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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묘낙서옥(文廟落書獄)

    조선시대사사건

     1606년(선조 39) 6월 25일 밤중에 성균관의 동무(東廡)에 잡인이 침입해 벽에 낙서를 해서 정부 고관을 비난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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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06년(선조 39) 6월 25일 밤중에 성균관의 동무(東廡)에 잡인이 침입해 벽에 낙서를 해서 정부 고관을 비난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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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역닫기영역열기내용
    낙서 내용은 상세하지는 않다. 다만, 당시 좌의정으로 있던 기자헌(奇自獻)을 공박하면서 그가 임금의 총애를 받아 좌의정으로 승진했다고 낙서하였다. 또한, 많은 궁인(宮人)과 나인의 이름과 함께 조정 고관들의 이름도 많이 적혀 있었다.
    특히, 기자헌은 자기 아버지의 이름뿐만 아니라 생질 이승원(李承元)의 이름과 이승원의 아버지 경기감사 이홍로(李弘老)의 이름까지 낙서되어 있어서, 10여 차례나 사의를 표명하다가 결국 7월에 사임하게 되었다. 이홍로는 일찍이 유생들의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난 일이 있는 인물이었다.
    이 밖에도 대사헌 성영(成泳), 대사간 황시(黃是), 집의 김대래(金大來), 지평 민경기(閔慶基), 정언 박안현(朴顔賢)·민덕남(閔德男), 사간 이호의(李好義), 헌납 유성(柳惺) 등의 이름도 낙서에 들어 있어서 이들이 한때 사의를 표명하는 일까지 있었다.
    이 때 일부에서는 지각없이 혈기왕성한 젊은이의 소행으로 불문에 부치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성균관은 성묘(聖廟)로서 신성한 곳이고 잡인이 출입할 수 없는 곳인데 이렇게 전대미문의 불상사가 일어났으니, 철저히 사실을 규명하라는 왕명이 있었다.
    이에 우의정 심희수(沈喜壽)를 조사의 책임자로 하고 위관(委官)으로 승지 최렴(崔濂), 동부승지 유간(柳澗) 등을 임명하였다. 조사를 하다 보니 자연 성균관 재임이나 유생들을 조사하게 되었다. 그런데 심희수는 유생을 아끼는 사람이라 조사가 미진하게 되어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송언신(宋言愼) 등의 항의를 받기도 하였다.
    이 사건으로 학유(學諭)고경오(高敬吾) 등 많은 유생들이 심한 조사를 받았고, 성균관의 많은 서사(書史)·수복(守僕)·노비 등이 혹은 도피하고 혹은 잡혀 모진 국문 후 죽었다. 기자헌이 물러나자 심희수가 좌상이 되고 우의정으로 허욱(許頊)이 승진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강주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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