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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봉(朴勝鳳)

개신교인물

 일제강점기 중추원 참의, 함경남도·평안남도 참여관 등을 역임한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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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일제강점기 중추원 참의, 함경남도·평안남도 참여관 등을 역임한 관료.친일반민족행위자.
영역닫기영역열기생애 및 활동사항
1871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반남(潘南)이며, 호는 산농(汕農)이다. 유학의 거장인 박윤원(朴胤源)의 종5대손이고, 박정양(朴定陽)·박영효(朴泳孝)와도 친척지간이 되는 명문가 출신이다. 1895년 법무아문에서 관직을 시작하여 민영익, 홍영식 등이 이끈 견미사절단의 일원으로 미국에 건너갔다. 그는 미국에서 주미공사관의 외교관으로 3년간 머물면서 개화 사상을 받아들었고, 귀국 후에는 개화 관료로 활동했다.
1904년 이상설과 함께 일제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에 대한 반대 상소를 올린 사실이 있으며, 1907년 평안북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당시 평안도는 개신교 계열의 계몽 운동이 활발하던 지역이었다. 그는 정주군의 유력한 기독교계 인사인 이승훈을 알게 되어 이상재와도 교류하면서 기독교 신앙에 입문했다. 처음에는 독립협회 출신들이 많이 출석한 연동교회에 나가다가 1909년 유길준의 동생으로 연동교회에 다니던 유성준과 함께 안동교회를 설립하고 초대 장로에 취임했다. 서울 중심부인 북촌에 세운 안동교회는 그와 같이 양반 명문가 출신으로서 개신교에 입문한 사람들이 주로 출석하게 되었다.
1908년에는 기호학교를 설립하였고 이상재와 함께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에도 참여하여 1913년 이사에 선출되었다. 1919년 이승훈의 주도로 기독교 인사들이 대거 가담한 3·1 운동 기획에 참여했고, 1921년 기독교 출판사인 광문사를 윤치호, 이상재, 이승훈과 함께 설립했으며, 1922년 조선민립대학기성회에도 참가하여 전형적인 개량주의적 구국 계몽 운동의 길을 걸었다. 1910년 한일병합 조약 체결 후 일제가 설치한 식민통치 자문기구인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찬의가 되었으며, 1921년 중추원 개편 후에는 참의직에 임명되었고 함경남도와 평안남도의 참여관도 지냈다. 1933년 8월 23일 사망했다.
박승봉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9·19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6: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415∼423)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어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7년)
김광수
개정 (2016년)
성주현(청암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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