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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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락
개념
조선시대 양반이 주민의 다수를 차지한 마을. 반중.
이칭
이칭
반중
목차
정의
조선시대 양반이 주민의 다수를 차지한 마을. 반중.
내용

민촌(民村)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양반은 사조(四祖) 내에 9품 이상의 관직에 오르지 못하면 양반층에서 탈락되었다. 그러나 지방에서는 그렇지 못한 자들도 향반(鄕班)이라 하여 양반으로 통하였다.

반촌은 각 고을의 도성 밖에 형성되었다. 대체로 미작을 주로 하는 경상도·충청도·전라도의 평야지대에 많았다. 이는 반촌 유지를 위해서 많은 토지와 인력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반촌 형성은 조선의 신분제 및 재산상속제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지배계층으로서의 양반은 조선 초기에 고려의 귀족·군벌·사림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들은 사전(私田)을 물적 기반으로 하고, 직접 생산자인 노비를 소유하여 반촌을 형성하였다.

특히 조선 초기의 자녀균분상속제도(子女均分相續制度)는 자녀들이 토지와 노비를 분할, 소유하게 함으로써 양반의 자손이 전국 각지에 분산 거주하여 새로운 반촌을 형성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형성시기는 중국 친족제도의 도입에 따라, 사족(士族)을 중심으로 한 동족마을이 발전하는 17세기 이후로 본다.

조선 말기에는 신분제도가 동요하여 양반의 수가 급증함에 따라 반촌도 급증하였다. 일반적으로 반촌은 다수의 양반과 소수의 양인, 그리고 다수의 천민들로 구성되었다.

양반은 대개 지주로서 직접 농업노동에 종사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양인이나 천민들은 양반의 토지를 소작하거나 노비로서 직접 생산활동에 종사하였다.

양반은 대부분 동족집단을 형성하였기 때문에, 반촌의 경우 1개 내지 3개의 동족집단이 동족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또한 동족일 경우에도 큰집·작은집의 관계가 엄하였다. 즉 반촌의 사회관계는 신분·혈연·지연을 매개로 형성되었다.

반촌에 거주하는 양인과 천민은 양반에 대해 지배와 복종의 관계에 놓여 있을 뿐만 아니라, 비동족원(非同族員)이었기 때문에 마을 내의 주요한 사회집단인 동족조직으로부터도 배제되었다.

반촌의 특징은 ㅁ자형의 기와집과 족보와 문집 등의 고문서를 들 수 있다. 반촌의 구성원들은 양반끼리만의 혼인, 즉 신분내혼제를 채택하며 지체에 따라 혼반(婚班)을 형성하여 갔다.

1801년(순조 1) 국가가 노비안(奴婢案)을 폐지함으로써 공노비를 양인화하였고, 1886년(고종 23)에는 노비의 세습제를 폐지하였다. 또한 1894년 갑오경장에 의하여 법적으로 노비제는 소멸되었다.

이에 따라 과거의 신분체제가 붕괴되어 반촌의 성격도 변화하였다. 즉, 반촌은 존재하였으나 그 구성원에 변화가 생기게 되었으며, 경제적 기반이 약한 일부 양반은 농업 등 생산활동에 종사하게 되었다.

반촌은 신분제가 사라진 오늘날에도 남아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그것과는 그 구성이나 사회구조 등에 있어서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인다.

참고문헌

『한국촌락사회사연구』(고승제, 일지사, 1977)
『영남사림파의 형성』(이수건, 영남대학교 출판부, 1979)
「취락구조와 신분구조」(여중철, 『한국의 사회와 문화』 2,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0)
「동족부락」(최재석, 『한국사』 13, 국사편찬위원회,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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