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수원에서 백지용(白持鏞)의 장녀로 출생하여 어려서 평양 중성(中城)에 옮겨 살았다. 7세에 부친을 여의었으며, 편모 김씨(金氏) 슬하에서 자라며 효행이 남다른 가운데 14세 때 안재욱(安裁煜)과 가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2년 만에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친정으로 돌아와 홀어머니를 모시고 온갖 궂은 삯일을 도맡아 하면서 청상과부로 재산을 모으기 시작했다.
어머니마저 여읜 뒤 더욱 근검절약하며 억척스러운 과수로 화장을 제대로 하는 일도 없이 불철주야 천한 일을 하여 큰 돈을 모아들였다. 그 뒤 평양 근교인 강동군(江東郡) 만달면(晩達面) 승호리(勝湖里) 일대의 광대한 황무지를 사들여 1900년대에 일본인 시멘트생산업자 오노다[小野田]에게 넘기면서 굴지의 평양 갑부가 되었다.
만달산(晩達山) 자체가 시멘트 원료인 석회 석산이었던 관계로 막대한 치부를 하게 되자 자선사업에 희사할 뜻을 굳혔다. 1908년 첫 공익사업으로 대동군(大同郡) 용산면(龍山面) 객산리(客山里) 솔뫼다리[松山橋]를 돌다리로 새로 부설하여 ‘백선교(白善橋)’라 이름하게 되었다.
1919년 3·1운동에 충격을 받고 1924년 모든 재산을 사회사업에 바치기로 공식발표한 뒤 당시 30만 원의 거금을 출연하여 평양 일대의 각급학교 지원의 육영사업과 시민들을 위한 문화시설로 대공회당(大公會堂)을 신축하였다. 대동강 옆의 이 웅대한 석조건물은 ‘백선행기념관’이라 하여 평양의 명소로 지목되었다.
1925년 광성소학교(光成小學校)에 1만 4000여 평과 숭현여학교(崇賢女學校)에 전답 2만 6000평을 기증하여 재단법인의 기초를 세우는가 하면, 1927년 미국선교사 모펫(Moffet, S. A., 馬布三悅)이 설립한 창덕소학교(彰德小學校)에도 부동산을 내놓아 교육재단을 만들도록 주선, 기백창덕보통학교(紀白彰德普通學校)로 발전시켰다.
이처럼 민족교육에 헌신하는 한편, 근우회(槿友會) 평양지회의 사회활동에도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보다 보람 있는 봉사사업의 소망을 품고 평양사회의 지도자 조만식(曺晩植)과 뜻을 같이하여 일본인들의 공회당인 평양 부민관보다 큰 민간문화운동의 집회장으로 도서관 겸용의 공회당 신축을 위한 백선행기념관 재단법인을 설립하였다.
이 재단법인의 재단이사장을 맡으면서 조만식·오윤선(吳胤善)·윤주일(尹柱逸), 그리고 최경렴(崔敬濂)을 이사로 하여 1927년 3월 10일 연광정(練光亭)이 올려다 보이는 대동문가에서 기념관 기공식을 하고, 3층의 화강암 건물을 지어 이듬해 9월 준공, 1929년 5월 7일 성대한 개관식을 거행하였다.
329평 대지 위에 연건평 총 324평의 백선행기념관 1층에는 1,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공회당, 2층에는 500명 수용의 집회실과 응접실·회의실·오락실 시설을 하고, 3층에는 도서관시설도 완비하였다.
1931년 12월 동상 건립이 추진되어 기념관 앞에 백선행동상이 1932년에 세워졌고, 이 무렵 숭현여학교와 광성보통학교에도 기념비가 세워졌다. 86세로 죽었으며 여성으로는 최초로 사회장이 엄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