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격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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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
말을 타지 않고 걸어다니면서 공을 쳐 승부를 내는 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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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말을 타지 않고 걸어다니면서 공을 쳐 승부를 내는 경기.
내용

말을 타고 행하는 격구방식을 간편화하여 걸어다니면서 공을 쳐서 정해진 구멍에 들어가게 하는 공치기 경기이다. 고려시대에 말을 타고 행한 격구의 방식이 조선시대에 와서 말을 타지 않고 보행하면서 행하는 놀이로 변형되었다.

이 보격구를 조선왕조실록에는 타구(打毬) 또는 봉희(捧戱)라고 기록하였으며, 후세에 와서는 장구(杖球)·장치기 혹은 얼레공이라고 불렀다.

≪태종실록≫에 의하면, 태종 13년 2월에 어린이 4명이 혜정교(惠正橋) 길거리에서 타구놀이를 하는데, 공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여서 하나는 임금님, 하나는 효령군, 하나는 충녕군, 하나는 반인(伴人)이라고 하였다. 공을 치다가 공 하나가 다리 밑의 물에 굴러들어가자 그 아이가 “효령군이 물에 빠졌다.”고 말하였다.

때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효령군의 유모가 듣고 쫓아가 잡아서 효령군의 장인에게 고하였다. 장인은 형조에 고발하여 이 아이들을 옥에 가두고 요언율(妖言律)로써 다스릴 것을 아뢰니, 태종은 아이들이 요언을 조작했다고 할 수 없으며 장난으로 한 짓을 가지고 죄를 줄 수 없다 하여 모두 무죄로 풀려나게 되었다.

이 사건은 보격구에 대한 최초의 기록으로, 태종 때 어린이들이 놀이로 행할 만큼 보격구가 일반화되었음을 알게 한다. 이 놀이는 어린이뿐 아니라 어른들도 즐겨 행했는데, 세종은 종친들과 더불어 궁궐 안뜰에서 타구놀이를 하였으며, 세조도 종친들이 행하는 봉희놀이를 베풀어 관람하였다.

≪세종실록≫(세종 3년 11월 25일)과 ≪세조실록≫(세조 1년 9월 8일) 기록에 보격구를 행하는 방법이 있다. 공을 치는 방법은, 여러 명 혹은 십여 명이나 수십 명이 편을 나누어 승부를 겨룬다.

공을 치는 막대기의 모양은 숟가락과 같고 크기는 손바닥만한데, 물소 가죽을 사용하며 두꺼운 대나무를 합하여 자루를 만든다. 막대기의 공을 치는 부분에 사용한 물소 가죽이 얇으면 공이 높이 솟고, 가죽의 두께가 두꺼우면 공이 높이 솟지 않는다. 공의 크기는 달걀만한데 마노(碼碯) 또는 나무로 만든다.

땅을 주발 모양과 같이 파서 공을 들여보내는 구멍을 만드는데, 이를 와아(窩兒)라고 한다. 와아는 평지나 섬돌 위에 만들어 놓기도 하고 혹은 전각(殿閣)을 사이에 두고 만들어 놓기도 한다.

공을 치는 사람은 서서 치기도 하고 무릎을 꿇고 치기도 하는데, 공이 날아 전각을 넘어가기도 하고 비스듬히 일어나기도 하며 혹은 굴러가기도 하여 각기 그 와아가 있는 곳에 따라 다르게 된다.

공이 와아에 들어가면 점수를 얻게 되는데, 한 번 쳐서 구멍 속에 들어가면 산가지 2개를 얻고, 한 번 쳐서 들어가지 못하고 공이 멈추어 있는 곳에서 두 번 세 번 쳐서 들어가면 산가지 1개를 얻는다.

한 번 쳐서 들어가면 다른 공은 두 번 치지 못하고 죽으며, 두 번 쳐서 들어가면 다른 공은 세 번 치지 못하고 죽는다. 한 번 친 공은 비록 다른 공과 부딪쳐도 죽지 않지만, 두 번 친 공이 다른 공과 부딪치게 되면 죽는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조목으로 된 경기규칙이 정해져 있어서 이에 따라 보격구를 하였다. 그러나 상류층에서는 점차 이 경기를 하지 않게 되어 임진왜란 이후 없어졌으나, 다만 항간의 서민들이 놀이로 행하여 그 명맥이 유지되어 내려왔다.

≪해동잡록≫에 죽주(竹州:충청북도 永同) 사람 박인석(朴仁碩)이 타구를 매우 잘했다는 기록에서 서민층이 이 경기를 행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1931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우리 競技 復興의 烽火, 杖球 얼레공大會 개최>라는 제목 아래 보도된 기사로 보아 보격구를 장구, 얼레공이라고 하여 이 경기가 연면히 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근래에 전국민속경연대회에 참가한 얼레공치기 민속경기도 이 보격구를 재현한 것이다.

참고문헌

『태종실록』
『세종실록』
『세조실록』
『해동잡록(海東雜錄)』
『조선일보』(제3626호, 1931.2.4.)
『동아일보』(제3630호, 193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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