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주군 ()

대동여지도 중 평안북도 삭주 부분
대동여지도 중 평안북도 삭주 부분
인문지리
지명
평안북도 서북부에 위치한 군.
정의
평안북도 서북부에 위치한 군.
개관

동북쪽은 창성군, 서쪽은 의주군, 남쪽은 태천군·구성군과 접하고, 북쪽은 압록강을 사이로 만주와 마주보고 있다.

동경 124°51′∼125°25′, 북위 40°1′∼40°29′에 위치하며, 면적 1,151.8㎢, 인구 6만 2536명(1943년 현재)이다. 1개 읍 7개 면 56개 동으로 되어 있으며, 군청 소재지는 삭주면 동부동이다.

자연환경

중앙부를 강남산맥이 동서로 횡단하며, 계반령(界畔嶺, 577m)을 경계로 남부지역과 북부지역으로 나누어진다. 이 산맥이 사방으로 뻗어 있는데, 동쪽 경계에는 가현령(佳峴嶺, 619m)·전무봉(氈舞峰, 997m), 서쪽 경계에는 천마산(天摩山, 1,169m) 등이 솟아 있다.

이러한 산세에 따라 분수령의 북방으로는 구곡천(九曲川)이 흘러 압록강으로 들어가고, 남쪽으로는 대령강(大寧江)이 발원해 여러 계곡의 물을 합쳐 다시 동남류해 대령강 본류를 이룬다.

일반적으로 산지가 많은 편이나, 대령강·구곡천의 유역과 계곡에 어느 정도 평지가 발달해 있어 거주지와 생산지대로 이용된다.

우리 나라 최북단이고, 내륙지방에 있어서 한서의 차가 심하며 대륙성 기후의 특징을 잘 나타낸다. 연평균기온 7.8℃, 1월 평균기온 -13℃, 8월 평균기온 24.7℃이고, 연강수량 929.8㎜이다.

역사

[고 대]

구석기·신석기시대는 물론, 아직까지 청동기시대의 유물·유적도 발견된 적이 없다. 그러나 인접한 의주군 미송리에서 신석기시대의 유물 및 주거지가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 고장에도 신석기시대에 사람이 살았을 가능성을 부인할 수 없다.

또 의주군 미송리·원하리·신암리 등에서 청동기시대의 유물 및 주거지가 발굴되고 있을 뿐 아니라, 같은 압록강 유역인 벽동군 연송리와 위원군 용연리에서도 청동기시대의 유물·유적이 확인되고 있어, 이 군에도 이 때 사람이 정착했을 가능성이 크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인근의 철산군·영변군·박천군·위원군·강계군·화천군 등지에서 연나라 화폐 명도전(明刀錢)이 발견되는 점이다. 연 소왕(昭王) 연간(기원전 312∼279)에 진개(秦開)가 고조선을 침공해 요동에 세력을 미치게 됨에 따라 연의 화폐가 흘러 들어왔음을 실증하고 있다.

이는 곧 스키토시베리아의 북방문화권과 중국문화권의 영향을 받아 지금의 만주와 한반도 지역에 동방문화권을 형성하고, 특히 고문헌에 많이 보이는 동이(東夷)·한(韓)·예맥(濊貊)의 이동을 고찰해 볼 때, 고조선시대에 최초로 형성된 단군조선이나 기자조선 및 위만조선, 그리고 한사군의 설치와 고구려의 건국에 이르기까지 이곳에도 종족 및 문화의 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삭주는 고구려 세력이 강성해짐에 따라 고구려 영토에 편입되어 군현이 설치되었을 것 같으나 기록이 없어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인접한 의주는 고국원왕 때의 국상(國相) 을파소(乙巴素)의 출생지였고, 고구려의 서울 국내성이 바로 의주의 대안(對岸)에 있었던 것은 주목할 만하다. 발해시대에는 서경압록부(西京鴨淥府)에 속해 있었다.

[고 려]

발해 멸망 후 이곳은 한동안 거란족·여진족의 근거지가 되었다. 고려는 건국 초부터 북진정책을 취해 성종 때 압록강변까지 도달, 청천강 이북 압록강 이남의 평안북도 서쪽과 평안남도 전역에 이르는 많은 지역을 수복하였다.

삭주는 본래 영새현(寧塞縣)이라 했다가 1018년(현종 9) 삭주로 고쳐 방어사를 두고 뒤에 부(府)로 승격하였다. 이 때 삭주를 비롯해 위주·인주(麟州)·태주·용주·선주·곽주·구주·운주(雲州)·연주(延州)·박주·가주·영주(靈州) 등지에 방어사를 둔 것은 이곳에 진을 설치해 거란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삭주의 주현군은 중낭장 1명, 낭장 5명, 별장 10명, 행군(行軍) 1,209명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거란과의 3차에 걸친 큰 전쟁을 치른 뒤 1033년(덕종 2) 8월에 기공해 1044년(정종 10) 10월에 완성한 천리장성은, 압록강구로부터 위원(威遠)·삭주를 지나 영삭(寧朔)·운주·청새(淸塞)·영변을 거쳐 평안남도의 영원·정융(定戎)·맹주로 나와 함경남도정평에 이르는 국방의 요새였다.

이와 같이 천리장성은 국토방위를 위한 것이기는 했으나 이에 따라 장성 이북 땅, 즉 벽동·초산·위원·강계·자성·후창 일대는 야인(野人)에게 방치하는 결과를 낳았다.

삭주는 만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서경·개경에 이르는 길목이기 때문에, 거란유종인 금산·금시 왕자의 침입, 여몽전쟁, 합단(哈丹)의 침입, 홍건적의 침구 등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여겨지나 구체적인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조 선]

1394년(태조 3) 경계가 들쭉날쭉하다고 해 고구주(古龜州) 및 부근 12촌을 합하고 지군사(知郡事)로 내렸다가 1413년(태종 13) 10월 도호부로 승격하였다. 1438년(세종 20) 6월 다시 군으로 내려 삭천(朔川)으로 고쳤다가 다음 해 윤2월 다시 삭주도호부로 승격시켰다.

『동국여지승람』에는 1439년에 군으로 강등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1432년에 호수 222호, 인구 394명이었고, 군정은 익군이 214명, 수성군이 20명, 선군이 75명이었다.

1466년(세조 12) 읍치(邑治)를 소삭주(小朔州)로 옮겨 독립 진(鎭)을 설치하였다. 관원은 부사·교수 각 1원이고 삭주진에 병마첨절제사 1원을 두어 부사가 겸임했으며, 진관(鎭管)에 구령보(仇寧堡)가 딸려 병마만호 1원을 두었다.

『여지도서』에 1759년(영조 35) 당시 삭주의 행정구역은 동면·백려자면(白呂字面)·북면·구령면(仇寧面)·역지면(驛只面)·천동면(泉洞面)·상단면(上端面)·하단면의 8개 면으로 구성되었으며 5,989호에 인구는 2만 2578명(남 8,919명, 여 1만 3659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근 대]

1871년(고종 8) 10월에 편찬된 『삭주읍지(朔州邑誌)』에는 행정구역이 모두 12개 면으로 4개 면이 늘어났다. 또 1895년(고종 32)에 편찬된 『삭주읍지』에는 민호 3,733호, 인구 1만 1963명으로 나와 있어 많은 감소현상을 보이는데,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갑오개혁 이듬해인 1895년 5월 지방관제를 개혁해 종래의 도·목·부·군·현제를 폐지하고, 부군제 실시로 전국을 23부 334군으로 나누어 부에는 관찰사, 군에는 군수를 두었는데, 삭주는 군으로서 의주부에 속하였다.

그러나 부군제는 불합리한 점이 많아 1896년에 다시 전국을 13도 1목 15부 337군으로 개편했는데, 이 때 평안도가 평안남도와 평안북도로 나누어져 삭주군은 평안북도에 속하게 되었다.

1907년 5월의 행정구역은 구곡면(九曲面)·성산면(城山面)·내동면(內東面)·상남면(上南面)·산서면(山西面)·하남면(下南面)·중남면(中南面)·외동면(外東面)·산전면(山前面)·산후면(山後面)·수우면(水右面)·풍면(豊面)의 12개 면으로 나누어져 구성되었으며 호수 4,421호, 인구 1만 7769명이었다.

일제강점기 말인 1943년 5월의 인구통계는 호수 1만 1821호, 인구 6만 2536명(남 3만 1505명, 여 3만 1031명)으로 1907년에 비해 현저한 증가를 나타냈다.

이것은 이 군이 산간에 있지만 압록강변에 면해 있고 수력이 풍부해 일제가 이를 이용, 만주 경영의 일환으로 1937년 9월 수풍댐을 건설하면서, 1939년 9월 정주(定州)에서 수풍에 이르는 평북선(平北線)을 개통함에 따라 산업·교통·공업·수산업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수풍은 압록강에 면한 이 군의 중요한 도시이다.

이 군은 평안북도의 특수한 지리적 위치로 인해 무장독립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된 곳이다. 3·1운동은 3월 5일 읍내에서 천도교·기독교가 연합해 만세시위를 벌인 것을 비롯해 10여 회에 걸쳐 격렬하게 전개되었는데,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 집회횟수 17회, 집회인수 3,500명, 사망자수 300명, 투옥자수 47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상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연통제(聯通制) 실시에 따라 1920년 5월 군감(郡監)에 김영호(金永昊)가 임명되었다. 이 군에서 활약한 무장독립단체로는 천마산광복군부대(天摩山光復軍部隊)·통의부제4중대(統義府第四中隊)·대한의군부출동대(大韓義軍府出動隊)·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대한광복군(大韓光復軍) 등이 기록에 보인다.

조선총독부 경무부가 발표한 고등경찰관계연표에 따르면, 1919년 3월 1일부터 1927년 12월 31일까지 이 군을 무대로 한 무장독립단의 활약은 1920년 6월 4일 6명이 신안면주재소(新安面駐在所)를 습격한 것을 비롯해 26건에 달한다.

김태연(金泰淵)·박응백(朴應伯)·이덕수(李德秀)·최석순(崔碩淳)은 무장독립단에 가담해 열렬하게 투쟁하다가 순국한 대표적인 의사이다.

유물·유적

선사시대 및 삼국시대의 유적으로 구곡면 연삼동과 외남면 대안동·태평동·청계동, 양산면 장하동 등지에 봉분이 낮은 고분들이 상당량 분포되어 있다. 이들 고분군에는 당장(唐葬)이라고 부르는 봉분의 지름이 7m에 달하는 고분들도 포함되어 있는데, 고구려고분으로 추정된다.

성곽유적으로는 수풍면 수풍동 압록강변에 높이 1.5∼2.5m, 너비 3.6m, 주위 1,363m에 달하는 토성이 있으며, 토성의 일부 성벽을 석축으로 쌓은 구령보지(九寧堡址)가 있다. 또 압록강의 행성(行城)이라 부르는 높이 1.5∼2.7m, 길이 730m 가량의 토성이 미륵산에 연해 있다.

그 밖에 삭주면 금오동과 구곡면 연삼동 등을 거치는 속칭 만리장성이라는 성곽의 한 갈래가 창성군과 삭주군의 경계를 거쳐 약 13㎞ 정도 남아 있는데 높이 1.5m, 너비 7.3m이다. 이 성곽은 다시 오봉산령(五峰山嶺)을 지나 계반령·온정령(溫井嶺)을 거쳐 의주군과의 경계에 있는 천마산 방면까지 이어져 있다.

외남면 대관동에는 대관성(大館城)이라 부르는 성곽이 삭주의 구읍을 둘러싸고 있는데, 높이 1.5m, 너비 1.5m, 둘레는 1.8㎞에 달한다.

불교문화재로는 양산면 장하동에 보현사(普賢寺)의 말사였던 중흥사지(重興寺址)가 있으며, 남서면 신온동에서 삭주면 온풍동으로 가는 길가에 북종사지(北鐘寺址)라고 하는 절터가 있다. 이 외에 남서면 송평동, 삭주면 온풍동 등지에는 크고 작은 이름을 알 수 없는 절터가 무수히 흩어져 있다.

교육·문화

삭주면에는 삭주향교와 1707년(숙종 33)에 세운 금창서원(金倉書院)이 있었다. 1915년의 통계조사에 따르면 서당이 74개에 달하였다.

근대교육기관으로는 삭주면과 구곡면에 각 1개교씩 사립학교가 세워졌고, 간이학교 8개교가 있었다. 이 밖에 신풍학원(新豊學院)·삼성학원(三星學院)이 있었다.

1911년 삭주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었고, 1920년대 이후 1면 1개교 정책에 따라 외남면에 대관공립보통학교(大館公立普通學校)가 설립되었으며, 뒤이어 12개의 공립보통학교가 각 면에 세워졌다.

1944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4개, 공립농업학교 1개교 등이 있다. 종교기관은 불교사찰 1개, 개신교교회 8개가 있다. 이 밖에 사회교육기관으로 삼육사(三育社)라는 신문·도서 열람소가 있어 군민들의 사회교육을 담당한다.

이 고장에는 현형(賢兄)과 치제(痴弟)에 관한 이야기가 전한다. 옛날에 어떤 형제가 살았는데, 형은 재간도 있고 매우 영리했으나 동생은 재간은 말할 것도 없고 어리석고 바보스러웠다. 그래서 항상 형의 애를 태웠으나, 형은 끝까지 아우를 잘 보살펴 주었다.

어느 날 형이 인근 산에 올라가서 산짐승을 잡으려고 덫을 놓아두고, 다음 날 동생에게 산에 가서 덫에 걸린 것이 있으면 가져오라고 하였다. 동생이 산에 가 보니 토끼가 걸려 있었는데, 이것을 이웃집 고양이로 알고 풀어 주고 내려왔다.

형이 집에 돌아온 동생한테 덫에 치인 것이 없더냐고 묻자 이웃집 고양이가 걸려 있어서 풀어 주고 왔다고 대답하였다. 형은 그것은 옆집 고양이가 아니고 토끼라고 알려 주고 다음에는 그것을 잡아오라고 하였다.

다음 날 산에 간 동생은 꿩이 치여 있는 것을 보고, 왜 이웃집 수탉이 걸려 있을까 하면서 이번에도 풀어 주었다. 집에 돌아와 형이 물으니까 이웃집 수탉이 걸려 있어 풀어 주었다고 대답하였다. 형은 그것은 수탉이 아니고 꿩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다음 날 산에 간 동생은 노루가 치여 있는 것을 보고 건너집 송아지가 왜 치여 있을까 하면서 또 풀어 주었다. 형이 동생에게 이 말을 듣고 그것은 송아지가 아니고 노루라고 가르쳐 주고, 다음에는 무엇이 걸려 있든지 꼭 묶어서 가져오라고 일렀다.

다음 날 산에 간 동생은 덫에 자기 어머니가 치여 있는 것을 보고도, 형이 무엇이든지 묶어 오라고 한 것을 지키려고 어머니를 꽁꽁 묶어 질질 끌고 산에서 내려와 죽게 하였다. 어머니가 죽자 형제는 장사를 지내려 했으나 먹을 것이 없어 남의 집 곳간에 몰래 숨어들어 쌀을 훔치려 하였다.

곳간에 들어가 곡식항아리를 열어 보는데, 무슨 소리가 나자 그 집 주인이 곳간을 들여다보았다. 형제는 보이지 않는 곳에 가만히 숨어 있어서 들키지 않았다. 그런데 주인이 문을 닫고 그냥 나가자, 동생이 이를 보고 히히거리며 크게 웃어 결국 주인에게 들키고 말았다.

자초지종을 들은 주인은 어머니 장사를 잘 지내라고 피 두 말을 주었다. 피를 가지고 집에 돌아와 형은 동생에게 죽을 쑤라고 일러 놓고 묘 자리를 파러 산에 갔다.

동생이 죽을 쑤는데, 죽이 끓으면서 ‘풀렁풀렁’ 소리를 내자 이 소리를 들은 동생이 “왜 형의 이름을 부르느냐.” 하고 화를 내면서 부뚜막을 헐어 버렸다.

이 바람에 솥이 앞으로 넘어지면서 ‘뽀지지, 뽀지지’ 소리가 났다. 그러자 “이놈의 가마가 왜 이번에는 내 이름을 부르느냐.” 하면서 가마를 밖으로 내동댕이쳤다.

이렇게 속을 태우는 동생이었지만 형제는 우애 있게 살았다고 하며, 형의 이름은 ‘풀렁이’, 동생 이름은 ‘뽀지지’였다고 전한다.

이 고장 민요로는 「밭김매는 소리」·「종달새노래」·「이빨빠진 아이 놀리는 노래」 등이 전한다. 「밭김매는 소리」의 가사는 “에헤야 에헤야 에헤야라 호호호 호무가 논다. 에헤야 에헤야 해는 장치 일모(日暮)한데 호무자루가 자주 논다”로 쪼그리고 앉아 김을 매면서 부르는 노래이다. 음악성이 꽤 높으며 곡조가 구슬퍼, 특히 저녁때 부르면 처량하게 들린다.

「종달새노래」의 가사는 “종달아 종달아, 어더메 갔더랭 새같에 갔더랬다. 멀하레 갔더랭 새끼 치러 갔더랬디, ○마리나 쳤네 두마리만 쳤다. 나 한 마리 주람 너 와 주갔네. 고운 거두 내 새끼 미운 거두 내 새끼 쫑이 쫑이 쫑이”로 종달새가 공중 높이 떠 있는 것을 보고 아이들이 소리 높여 외치며 부른다.

혼자 외치기도 하고 여럿이 외치기도 하는데, 음악성은 별로 없으나 일상회화와는 다르게 운율성이 있어 노래라고 부른다.

「이빨빠진 아이 놀리기」의 가사는 “앞니 빵아 달강숭이 소궁이 앞에 가디 마라 수탉한데 쪼인다”이다. 6, 7세쯤 된 아이의 젖니가 빠진 것을 놀리는 노래로 전국 각지에 널리 퍼져 있으나, 이 고장의 것은 특히 노랫말이 재미있다.

산업·교통

산지가 많아 농업은 주로 밭농사가 이루어지며, 주요 농산물로 쌀이 약간 생산되고 조·메밀·옥수수·콩·감자·대마·면화 등이 많이 생산된다. 밭농사는 ‘돌려짓기’가 발달해 이 군의 경작형태의 특징을 이룬다.

부업으로는 누에치기·축우·양돈 등이 활발하며, 특히 작잠(柞蠶 : 멧누에)은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산악지대는 원시림이 울창해 압록강재(鴨綠江材)의 보급원이 된다.

광산물로는 금·은·운모·흑연 등이 나는데, 특히 대창(大昌)·신연(新延)·교동(橋洞)·은곡(銀谷)·신창(新昌)·금창(金倉) 등의 우수한 금·은광산이 산재해 있다.

우리 나라 최대의 수풍발전소는 시설량 60만 ㎾로 동양 제일을 자랑하며, 관서공업지대와 남만주 일대의 동력원이 된다. 이 전력은 청수리의 화학공장에 이용된다.

시장은 『임원경제지』에 따르면, 1830년경 5일장인 부내장(府內場)과 백려자면의 대관장이 있었고, 거래품목은 주로 쌀·콩·조·옥수수·포목·솜·철물·나무그릇·잎담배·돼지·닭·소 등이었다. 또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1902년경 부내장·관장·막령장(幕嶺場)·호장(胡場)이 섰다.

1926년에는 공설시장으로 5일장인 삭주면의 읍내장, 외남면의 남창장·대관장, 양산면의 원풍장 등 4개 장이 있었다. 이들 시장은 1938년에도 거래가 매우 활발했으며, 그 중 삭주읍내장이 규모가 가장 큰 3·8일장이었다.

교통은 정주·구성 방면에서 팔영령(八營嶺, 298m)을 넘어 군의 중앙부를 지나 북상하는 2등도로와 의주에서 압록강 남안의 국경지대를 통과하는 2등도로 등이 있다. 각 지방의 면 소재지에 이르는 지방도로는 미비한 상태이다.

그러나 평북선(정주∼수풍간, 128.5㎞)이 남북으로 개통되었고, 군내에 대안(大安)·대관(大館)·창평(昌坪)·삭주온천(朔州溫泉)·삭주·신안(新安)·부풍·수풍 등의 여러 역이 있어서 교통에 큰 몫을 한다.

읍·면

[청수읍 靑水邑]

군의 서북부에 위치한 읍. 읍 소재지는 청수동이다. 본래 고구려의 옛터였는데 고구려가 패망한 뒤 발해의 서경압록부에 속했고, 그 뒤 거란족·여진족의 거점이 되었다가 고려 때 수복되었다.

1018년(현종 9) 이후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군(郡)의 수차례 승·하격(昇下格)에 따라 변동이 있다가, 1895년(고종 32)의 행정구역 개편 이후 오늘에 이르렀다.

청수(靑水)라는 명칭은 압록강의 맑고 푸른 물에서 유래되었다. 이곳은 압록강의 수운교통의 중심으로서 빠른 발전을 이루었으며, 평북선의 최종역으로서 압록강을 지나 중국 만주 지안현(輯安縣) 창던히커우에 연결되며, 이 지역 특산물인 원시림지대의 압록재(鴨綠材)를 하류로 보급해 주는 보급원이 되고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청수(靑水)·옥토(沃土)·신포(新浦)·노토탄(老土炭) 등 4개 동이 있다.

[구곡면 九曲面]

군의 서북부에 위치한 면. 면 소재지는 신안동이다. 본래 고구려의 옛터였다가 발해의 서경압록부에 속한 뒤, 거란족·여진족의 점령지가 되었다가 고려조에 수복되어 조선조를 거쳐 지금에 이른다. 구곡의 명칭은 구곡천의 곡류하천에서 유래되었다.

내륙산악지역으로 높은 지대를 이루며, 높은 지대 위를 구곡천이 사행한다. 서쪽에는 철봉산(鐵峰山, 564m)·삿갓봉[笠峰, 473m]·판막령(板幕嶺, 348m) 등의 산들이 연이어 있고, 남쪽에는 거문산(巨門山, 1,049m)이 군의 경계를 이루어 주요 임산자원의 보급원이 되며, 이러한 자원은 구곡천을 통해 압록강으로 유입된다.

주요 산업은 임업으로 목재·목탄·펄프 등을 생산하며, 농업은 주로 밭농사가 이루어져 조·콩·메밀·옥수수 등의 잡곡을 생산하고, 양잠과 양봉이 이루어진다. 유적으로는 망북정(望北亭)·보현사·구일정(九一亭)·북재(北齋)와 길이 23㎞의 영삭진(寧朔鎭)이 있으며, 판막동에 팔막령행성(八幕嶺行城)과 창성군의 경계에 연평령행성(延坪嶺行城)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간이학교 1개교, 국민학교 3개교가 있다. 신안(新安)·연삼(延三)·송정(松亭)·판막(板幕)·인풍(仁豊) 등 5개 동이 있다.

[남서면 南西面]

군의 중서부에 위치한 면. 면 소재지는 송평동이다. 본래 고구려의 옛터였다가 발해의 서경압록부에 속한 뒤 거란족·여진족의 점령지가 되었다가 고려 때 수복되었다. 그 뒤 여러 차례 군의 변동이 있었고 1895년 행정구역 개편 이후 지금에 이른다.

조두산맥(鳥頭山脈)을 중심으로 강남산맥(江南山脈)이 요동방향으로 뻗어 있으며, 이곳에서 발원한 여러 하천 지류는 대령강에 합류해 압록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동쪽에는 신덕산(新德山, 534m), 서쪽에는 천마산이 있다. 천마산 동쪽에서는 대관천(大館川)이 발원해 대령강으로 유입한다.

주요 산업은 농업과 임업으로, 농업은 주로 밭농사를 중심으로 조·콩·팥·옥수수 등의 잡곡이 많이 생산되며, 임업은 주변의 침엽수림을 이용한 제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유적으로는 토성으로 된 명원진(明遠鎭)이 있으며, 천마산과 석굴암(石窟庵), 이화정(李花亭)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간이학교 1개교,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송평(松坪)·창신(昌新)·주남(州南)·운림(雲林)·명상(明上)·신온(新溫)·오성(五城) 등 7개 동이 있다.

[삭주면 朔州面]

군의 북부에 위치한 면. 면 소재지는 동부동이다. 본래 고구려의 옛터였다가 고구려가 패망한 뒤 발해의 서경압록부에 속했고, 그 뒤 거란족·여진족의 점령지가 되었다.

고려조에 와서 수복됨에 따라 1018년(현종 9)부터 조선조에 이르는 동안 삭주·안삭(安朔)·영삭(寧朔)·영한(寧寒)·삭주로 변했으며, 1895년(고종 32) 행정구역 개편 이후 지금에 이른다.

계반산맥(界畔山脈)과 조두산맥을 중심으로 강남산맥이 동서로 뻗어 있으며, 칠원지수(七源之水)는 대령강에 유입되고, 계반령에서 발원한 금창강(金倉江)과 남평동(南坪洞)을 지나 동북의 석교천(石橋川)과 합류되어 삭주를 지나 구곡천에 합류되어 압록강에 이른다.

서남부에는 거문산·오봉산(五峰山, 882m)·어두산(於頭山, 911m) 등이 있고, 이들 산지지역의 교통로를 이루는 계반령·온정령(溫井嶺, 374m)·곽가령(郭哥嶺, 524m) 등의 고개가 있다.

주요 산업은 농업과 임업으로, 농업은 밭농사를 중심으로 메밀·감자·면화 등의 생산이 많으며, 임업으로는 압록재의 보급원으로서 목재·목탄·펄프 등을 생산한다.

유적으로는 남서면과의 경계에 계반령행성(界畔嶺行城)이 있으며, 망일루(望日樓)·은선대(隱仙臺)가 있다. 그 밖에 삭주온천·유금정(遊錦亭)·영천대(泳川臺)·승선대(昇仙臺)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3개교가 있다. 동부(東部)·서부(西部)·남평(南坪)·온풍(溫豊)·대대(大垈)·광성(廣城)·소덕(蘇德)·용영(龍泳)·금오(金五) 등 9개 동이 있다.

[수동면 水東面]

군의 남단에 위치한 면. 면 소재지는 인풍동이다. 본래 고구려의 옛터였다가 발해의 서경압록부에 속한 뒤 거란족·여진족에게 점령당했으나 고려조에 수복되었으며, 1895년(고종 32)에 행정구역이 개편된 뒤 지금에 이른다. 수동이라는 명칭은 군의 중앙부를 흐르는 대령강의 동쪽에 위치해 붙여진 이름이다.

북쪽 양산면과의 경계에 창창산(昌昌山, 805m)의 줄기가 동쪽으로 뻗어 있으며, 이곳에서 발원한 하천은 대령강의 지류가 되어 면의 중앙부를 거쳐 양부동을 지나 태천군의 강서면으로 유입된다.

주요 산업은 농업으로, 밭농사를 중심으로 조·콩·수수·메밀·감자 등을 생산한다. 그 밖에 임업도 이루어진다. 교육기관으로는 간이학교 2개교,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인풍(仁豊)·신상(新上)·봉현(鳳峴)·용흥(龍興)·안풍(安豊)·용성(龍城)·덕유(德楡)·이풍(梨豊)·양부(兩富) 등 9개 동이 있다.

[수풍면 水豊面]

군의 최북단에 위치한 면. 면 소재지는 수풍동이다. 수풍이라는 명칭은 수량이 풍부한 압록강의 연안에 있다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북쪽에 유명한 압록강이 세차게 흐르면서 군의 경계인 동시에 국경을 이루고, 면의 중앙부를 흐르는 구곡천은 수풍면을 지나 압록강으로 유입되면서 서쪽에 있는 구곡면과 경계를 이룬다.

주요 산업은 수산업과 임업이다. 강안에 있는 산악지역으로 은구어·붕어·메기·쏘가리 등 각종 담수어가 풍부한 압록강 유역에서 수산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며, 압록재의 보급원으로서 임업도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수풍동구령포(九寧浦)에 건설된 수풍발전소는 60만 ㎾의 전력을 생산해 관서지방의 도시·농어촌 및 공업지대의 동력원이 되고 있다. 교통수단은 여름철에 뗏목운반으로 압록강이 수운역할을 하며, 수풍발전소가 건설되면서 평북선이 수풍까지 연장, 부설되었다.

유적으로는 압록강안에 구령보가 있으며, 명소로는 수풍동의 수풍호(水豊湖)가 유명하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수풍(水豊)·신풍(新豊)·연포(延浦) 등 3개 동이 있다.

[양산면 兩山面]

군의 동단에 위치한 면. 면 소재지는 원풍동이다. 중앙부에 신덕산(新德山, 534m)·학무봉(鶴舞峰)이 위치해 분수령을 이루며, 북쪽에 부거산(富居山, 869m), 남쪽에 창창산 등 높은 산이 많아 비교적 험준한 편이다.

주요 산업은 산지가 탁월한 지형적 조건으로 약간의 밭농사가 이루어지며, 그 밖에 양봉과 작잠이 이루어진다. 임업이 발달해 임재·펄프 등을 생산한다. 명소로는 용산동에 비룡폭포(飛龍瀑布), 금풍동에 구암릉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간이학교 3개교, 국민학교 1개교가 있다. 원풍(院豊)·용산(龍山)·금풍(金豊)·용창(龍昌)·답풍(畓風)·덕상(德上)·요대(料大)·장하(庄下)·서흥(書興)·장토(庄土) 등 10개 동이 있다.

[외남면 外南面]

군의 남부에 위치한 면. 면 소재지는 대관동이다. 남쪽에 은창산(銀倉山, 931m)·삼봉산(三峰山, 634m)·팔영령(八營嶺, 298m) 등이 솟아 있어 산지를 이룬다. 대관동 동쪽에는 연대봉(煙臺峰)이라는 높은 산봉우리가 있어 절경을 이루는데, 이곳은 조선시대에 봉화(烽火)를 올린 곳으로 꼭대기는 평평광활하고 노송이 울창해 풍경이 아름답다.

주요 산업은 농업과 임업이며, 대령강과 그 지류인 대관천이 관류하면서 충적평야를 이루어 군내에서 쌀을 가장 많이 생산하고, 그 외에 조·콩·수수 등을 생산한다. 임업으로는 천마산의 임재가 주종을 이루며, 장마철에는 여기서 벌채한 목재를 대령강의 수운을 이용해 박천군 방면으로 유벌운반(流筏運搬)한다.

교통은 팔영령이 남부 산간지대의 교통로로 이용된다. 유적지로는 대삭주창주진지(大朔州昌州鎭址)·기이역지(岐伊驛址)·영인진(寧仁鎭)·대관성·송재유지(松齋遺址) 등이 있으며, 명소로는 태평동의 관소(官沼)·관란폭(觀瀾瀑)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유아원 1개, 간이학교 1개교, 국민학교 3개교가 있다. 대관(大舘)·대안(大安)·남장(南長)·만석(萬石)·청계(淸溪)·은창(銀倉)·태평(泰坪)·수룡(水龍)·송남(松南) 등 9개 동이 있다.

광복 후 변천

평안북도 북부에 있는 군. 동쪽은 창성군, 서쪽은 의주군, 남쪽은 천마군·대관군, 북쪽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접해 있다. 동경 124°42′∼125°13′, 북위 40°12′∼40°29′에 위치하며, 인구는 13만 5000여 명이다(1996년 추정).

1952년 12월 삭주군 청수면·구곡면·삭주면·수풍면과 창성군 창성면 간암리 일부를 포함해 새로운 삭주군이 되었고, 1954년 10월에는 부풍리를 나누어 그 일부는 신풍리, 나머지는 수풍노동자구로 편입시켰다.

1974년 5월 창성군을 없애고 추리와 삼화리를 제외한 전 지역을 삭주군에 편입시켰다. 1978년 10월 대대리를 대대노동자구로 개칭하면서 소덕리를 없애고 그 일부는 대대노동자구에, 나머지는 용암리에 편입시켰다.

행정구역은 삭주읍과 수풍(水豊)·청성(淸城)·청수(靑水) 등 3개 노동자구, 대대(大垈)·용암(龍巖)·금부(金部)·신서(新西)·연삼(延三)·구곡(九曲)·신풍(新豊)·천감(泉甘)·도령(都嶺)·옥강(玉江)·방산(方山)·내옥(內玉)·당목(棠木)·북사(北社)·중대(中臺)·좌(佐)·부평(富坪)·판막(板幕)·상광(上廣) 등 19개 이로 되어 있다. 군 소재지는 삭주읍이다.

[자연환경]

이 군은 전반적으로 지역이 대체로 산지로 되어 있으며, 지세는 남부에서 압록강 연안으로 가면서 점차 낮아진다. 군에서 제일 높은 산은 거문산(1,046m)이며, 주요 하천은 합수천·구곡천·당목천 등으로 모두 압록강으로 흘러든다.

기후는 대체로 대륙성 기후의 특성을 나타내면서 수풍호의 영향을 받기도 한다. 연평균기온 8.1℃, 1월 평균기온 -10.1℃, 8월 평균기온 23.4℃이며, 연평균강수량은 1,096㎜이다. 첫서리는 10월 9일경, 마감서리는 3월 3일경에 내린다. 산림은 군면적의 80%이며, 이 중 90%가 임목지이다.

[인문환경]

수풍호는 내수면으로서 발전, 담수어 양식, 유람선 운항 등에 기여하며, 현재 수풍·동주리(東主里)·창성(昌城)·초산(楚山) 구간에 화객선이 운항된다. 여기에는 수풍발전소가 있어 카바이드를 비롯한 기초화학제품과 비료 생산기지로서 비중이 크다.

1980년 1월 북한∼중국 압록강수력발전회사이사회 제32차 회의(북경)에서 태평만발전소 건설문제가 제기되어 1981년 2월 동 이사회 제33차 회의(평양)에서 공동건설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1985년 12월 1호기를 완공한 데 이어 1986년 11월, 12월에 각각 2호기와 3호기, 1987년 11월에 4호기를 완공하였다.

여기에서 생산된 전기는 중국과 반반씩 나누어 사용하는데 북한의 주 송전대상은 신의주 공업지역의 화학섬유와 제지공장이다. 1·2호기는 중국측에, 3○4호기는 북한측에 송전한다. 발전소 설비용량은 19만 ㎾, 연평균 전력생산량은 7억7000만 ㎾/h 정도이며, 형태는 계단식 발전소이다.

삭주식료공장은 130여 종의 식료품을 생산하고 100정보의 포도밭과 연산 300t 능력의 오리목장을 운영한다. 삭주온천이 있고, 온천 일대에는 황목련이 군락을 이루어 자생하고 있어 식물보호구로 지정되어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고려사(高麗史)』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삭주부읍지(朔州府邑誌)』
『평안북도지』(평안북도지편찬위원회, 1973)
『삭주군지』(삭주군지편찬위원회, 1978)
『북한문화재실태와 현황』(문화재관리국, 1985)
『인물의 고향·북한편·』(중앙일보사, 1991)
『북한지지요람』(통일원, 1993)
『북한의 관광자원』(한국관광공사, 1991)
『북한의 산업』(대한무역진흥공사, 1995)
관련 미디어 (4)
집필자
노도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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