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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막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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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
개념
도구나 공식 등을 이용해 수를 계산하는 계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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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도구나 공식 등을 이용해 수를 계산하는 계산법.
내용

극히 일부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최석정(崔錫鼎)의 ≪구수략 九數略≫에 소개된 바 있는 주산(籌算)이 조선 숙종대 이후에 사용된 흔적이 있다. 주산이라는 명칭은 산목을 뜻하는 주(籌) 때문에 오해받기 쉽지만, 유럽에서 네이피어 로드(Napier rods) 또는 네이피어 본(Napier bones)이라고 불린, 소위 격자산법(格子算法)이다.

매문정(梅文鼎)은 이것을 ≪주산 籌算≫(1678)이라는 저술을 통해 중국식의 독특한 형태로 고쳐서 소개하였다. 그는 원형(原形)의 세로 금을 가로 금으로 고쳐 긋고, 자릿수[位數]를 구별하기 위해 쓰이는 빗금을 반원(半圓)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곱셈구구를 표기한 막대를 사용해서 조작하는 일종의 기계적 필산술(筆算術)이라는 기본 구조는 그대로 본받고 있다. 주산의 도시(圖示)는 근세의 산서(算書)에 종종 나타나고 있으며, 당시 쓰인 계산막대[籌算盤]가 현재 민속박물관에도 보존되어 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서는 주산이 급격히 일반에게 보급되었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그것을 여전히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렇다고 당시의 조선에 주산의 방법이 전해지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흔히 ‘주산(珠算)의 책’으로 알려진 정대위(程大位)의 ≪산법통종 算法統宗≫이 출간되자(1593), 곧바로 조선에 소개된 모양이다.

그래서 중국의 수학사가 이엄(李儼)은 추정하고 1592년부터 1598년에 이르는 7년에 걸친 전란중에 이 산서가 일본에 전해졌다고 있다. 조선침략의 병참기지였던 나고야(名護屋)의 마에다가(前田家) 진영에서 일본 최초의 주판이 쓰였다는 설은 이엄의 이 주장과 암암리에 부합되는 데가 있다.

≪산법통종≫은 조선 산사(算士)의 정규 교과서로는 채택되지 않았으나, 회계관리나 수학에 관심을 가진 식자층에서는 대단히 인기가 있었던 모양이며, 우리가 아는 한 조선시대의 중국 산서 중 이 책이 가장 많이 눈에 띈다. 이 사실로 미루어 보면 ≪산법통종≫의 보급률은 상당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에 주판을 사용해서 계산을 했다는 기록은 아직 본 적이 없다. 오히려 그 반대의 예를 알 수 있을 뿐이다.

주산을 소개한 산서로는 조선 말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주학신편 籌學新編≫이 있는데, 이 책의 저자는 ≪구수략≫에서처럼 주산을 배격하고 있지는 않으나, 주판의 구조에 관해 기본적인 설명만으로 간단히 끝내고, 계산방법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이 책이 주산에 관한 당시의 일반적인 경향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최석정의 ≪구수략≫ 이후 200년이 지난 개화기에서조차 여전히 주산은 냉대를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구수략≫에서 볼 수 있는 공격적인 반발, ≪주학신편≫의 소극적인 소개, 심지어 주산에 관해서는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은 산서가 많았다는 사실에서, 사대부층과 산학자 사회에서는 물론, 기타 식자들 사이에도 주판이 보급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이 산목을 주판으로 바꾼 이후에도 여전히 전통적인 방법을 지켰던 조선 계산술의 보수성은 조선 말에 이르러 상업사회의 일각으로부터 차차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위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상단에 두 개씩의 알[珠]이 있는 중국식 주판이 상인들 사이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고, 그 유물은 현재도 많이 볼 수 있다.

여기에서 다음 단서를 붙여 둘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읽기·쓰기·수판셈을 서민교육의 목표로 삼았던 일본의 에도시대(江戶時代, 1603∼1866)처럼, 널리 일반에게까지 주산이 확대, 보급될 가능성은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주산과 같은 계산기술이 중요시될 만큼 서민생활 속에 상행위가 파고들지 못하고 있었다. 상업활동이 민간사회 속에 기반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고, 따라서 유럽의 상업도시는 그만두고라도, 심지어 중국이나 일본에 견줄 만한 상업사회조차 형성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교육은 한마디로 문인 관료로 출세하는 엘리트를 양성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중국계의 이 과거 준비교육은 일본의 데라코야(寺子屋)에서의 서민교육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것이었다. 교육과정의 중심은 사서삼경이었으며, 이러한 한적(漢籍)을 암송하는 것이 학생에게 주어진 필수의, 그리고 최대의 과제였다.

당연히 ‘독서백번’식의 공부가 장려될 수밖에 없었고, 몇 번 독파했는가를 기록하려면 서산이 필요했을 것이다. 어린 시절에 서당에서 공부를 한 적이 있는 연령층의 사람이면 반드시 기억이 나겠지만, 앞의 사진에 보이는 산기(算器)의 구조는 원리적으로는 주판의 그것과 동일하다. 즉, 책을 한 번 독파할 때마다 하나씩 넘기고, 다섯 번을 마치면 위쪽에 있는 것을 한장 넘기도록 되어 있다.

주산이 보급되지 않았던 대신에, 그 구조를 본뜬 것으로 짐작되는 이런 계산기가 독서가의 서재 속에서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은, 전통적인 교양사회에서 셈의 실제적인 구실이 무엇이었는가를 시사하는 한 예로 볼 수 있다. 이 간편한 산기가 나타나기 전에는 일일이 붓으로 그어 횟수를 표시하기도 했던 모양이다.

(1) 결승(結繩)

“상고(上古)는 결승에서 시작하여 후세의 성인이 이것을 서계(書契, 刻記)로 바꾸었다.”고 ≪역 易≫ 계사전(繫辭傳)에 쓰여 있다. 이러한 기사가 아마도 동양문화권에서 셈에 관한 최고(最古)의 문헌일 것이다. 그러나 문자를 갖지 않았던 우리 나라의 하급 서민층에서는 결승법이 극히 최근까지 수를 기록하기 위해서 상당히 폭넓게 사용되어 온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 [그림]은 지금으로부터 70년 전, 그러니까 금세기 초에 전라남도 장성지방의 농가에서 사용했다고 하는 결승법을 노인의 증언에 의해서 재현해 본 것이다. 현재까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지방에 따라서 형태에도 차이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결승이라고 해도 다음 [그림]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치밀한 오키나와(冲繩)의 그것에 비하면 방법이 여러 가지일 뿐만 아니라, 구조면에서도 극히 조잡하다.

글을 사용할 줄 모르는 영세 농민사회에서 소량인 곡물의 대차관계를 기록하는 일시적인 방편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볼품 없이 엉성한 짜임새 그대로 지탱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2) 각기(刻記)

인류학적으로 보아 원시사회에서 널리 쓰인 수(數)에 관한 기록 가운데 하나는 각목(刻木, tally)에 의한 방법이다. 예를 들면, 한나라 숫자(數字)의 오(五)는 이러한 각목문자를 바탕으로 성립한 것이다. 즉, 이 숫자는 다섯 번 새긴 금으로 이루어져 있다.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를 찾아온 적이 있는 서긍(徐兢)은 ≪고려도경 高麗圖經≫(1123)이라는 고려 방문기 속에서 당시 고려의 사정을 간결하면서도 인상 깊은 표현으로 전하고 있다. 고려의 수도 개성의 화려한 궁궐·누각·사원, 그리고 육성(六省)·구시(九寺) 이하의 여러 관청 및 질서정연한 도시계획에 경탄하면서도, 그것들을 도성 밖에 있는 민가의 초라한 모습과 대조시키는 것을 잊지 않고 있다.

이 인상기 중 특히 수학사(數學史)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회계관리가 문자를 쓰지 않고 탤리[刻記]에 의해서 수를 나타냈다는 대목이다. 고려의 풍습에는 산목계산은 없고, 출납회계를 할 때 회계관이 나무토막에 칼로 한 개씩 금을 긋는다. 일이 끝나면 그것을 버리고 보관하는 법이 없으니, 기록하는 법이 너무도 단순하다. 이것은 아마 옛 결승법의 유풍인 것 같다.

산사제도(算士制度)가 이미 성립해 있던 고려왕조였기 때문에 이러한 원시적인 방법이 중앙관청에서 행해지지 않았던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나 웅장한 왕성과 허술하기 짝이 없는 민가군(民家群)의 대응은 귀족적인 문자문화와 민간 및 지방 관서에서의 원시적인 셈이라는 평행관계에 그대로 반영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계산수단의 발달을 촉구하기에는 너무나도 정체적이었던 서민의 경제생활에서는 사실 탤리 이상의 표시법은 필요 없었고, 따라서 지방 하급관리의 회계방법도 이 정도의 것으로 족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소박한 표기법은 글을 모르는 대중사회에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낯익은 풍습이었던 모양이다. 시골 아낙네를 상대하는 일용품 소매상인이 외상 액수를 물건을 사는 농가의 기둥에 낫이나 칼 따위로 금을 긋고 표시하는 일종의 탤리가 그 한 예이다.

또, 베틀에 쓰이는 바디살의 개수를 나타내는 수사(數詞)를 거의 문맹상태인 농가의 부녀자를 상대로 표시하기 위해서는 사진에 있는 바와 같은 탤리에 의하는 것이 극히 당연스러운 일이었다. 이 밖에 민간에서 나무의 잔가지 등을 사용한 계산이 흔히 행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하멜표류기≫를 비롯한 조선시대 말의 외국인 견문기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참고문헌

『한국수학사』(김용운·김용국, 열화당,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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