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극 초창기 여배우의 한 사람으로 타계할 때까지 인기를 누린 최장수 여배우였다. 평안남도의 서민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일찍 서울로 이주하여 진명(進明)여학교를 다니다가 기방에 들어갔다. 그 뒤 기생의 몸으로 여기저기 요정에서 일하다가 극단 토월회 전무였던 이서구(李瑞求)의 눈에 띄어 광무대 시절 토월회 배우로서 연극계에 투신하였다.
그가 여배우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빼어난 용모에다가 적극적인 성격이 원인이 되었지만 그보다도 그녀 자신이 연극을 매우 좋아했고 따라서 토월회 연극을 자주 관람한 데 따른 것이다. 여배우가 대단히 부족했던 그 당시, 그녀는 토월회로부터 기방 급료에 못지 않은 60원이라는 거금을 받고 무대에 서게 되었다.
1925년 광무대 공연의 <추풍감별곡>의 주역인 추향을 맡아 첫 무대를 밟았다. 데뷔 공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배짱 있고 괄괄한 성격이어서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으며 첫 무대부터 개성파 배우로서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그로부터 그녀는 선배 복혜숙(卜惠淑)과 쌍벽을 이루면서 연극무대의 신데렐라로 각광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의 대표작은 <희생하든 날 밤> · <춘향전> · <산 송장> · <쟌발쟌> · <혈육> 등이었는데, 영화계로부터 출연 교섭이 잇따랐다. 본래 <약혼>이라는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으나 연극만큼 각광을 받지는 못했다. 본래 영화보다는 연극체질이었고 따라서 <아리랑고개> · <모란등기> 같은 무대극에서 보다 많은 인기를 끌었다.
워낙 억세고 저돌적인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연기생활과 실제생활에서 억눌려 살아온 당시 여성들의 우상이 될 만큼 스타로 부상하였다. 이후 충청도 갑부에게 시집을 갔지만 결혼생활은 순탄치 못했고 다시 무대와 스크린에 복귀하여 맹활약하였다.
1930년대에는 미나도좌 신극부에서 출연하고 태양극장의 주역으로 다시 등장했으며 태양극장이 해산되면서 주로 영화에 출연했다. 해방과 함께 토월회 재건무대에 복귀했으나 다시 영화계로 옮겨가서 조연배우로서 꾸준히 인기를 모았다.
분단과 함께 남편과 자녀가 월북함으로써 말년은 외로웠으나 1990년대 초까지 간간이 영화와 TV 드라마의 노역으로 활동한 바 있다. 그녀는 성격배우로서 무대와 스크린에서 강인한 어머니와 할머니상을 심어준 추억의 스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