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현, 무형유산)로 지정되었다. ‘답교(踏橋)놀이’라고도 한다. 다리밟기 풍습은 전통적으로 경향(京鄕) 각지에서 정월대보름을 전후해서 행해지던 세시풍속으로 한 해 동안의 액운을 방지하고 다리의 병을 예방하며 또한 무병하기를 기원하는 데 있다.
다리밟기는 밤에 행하였는데 밤새도록 다리밟기를 하여도 이날만은 야간 늦게 통행을 금지하는 법까지 늦추어주었음을 보아 이 행사를 매우 소중하게 취급하였던 것 같다.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 芝峰類說≫(1614)에 보면 상원에 노는 답교놀이는 전조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평상시에는 심히 풍성했다. 사녀(士女)들이 나란히 줄로 서서 밤늦도록 끊이지 않았으며 법관(法官)도 금하지 않고 체포하지도 않았다. 지금에는 부녀들의 답교로 풍속화 되어 계속되어 왔다고 하였다.
또 ≪경도잡지 京都雜志≫ · ≪열양세시기 洌陽歲時記≫ · ≪동국세시기 東國歲時記≫ 등에는 답교를 하는 다리들은 서울의 중앙인 종로를 중심으로 해서 대소광통교(大小廣通橋)와 수표교(水標橋) 위에서 벌어졌고, 여기에 참가하는 사람들에 있어서도 상하 층 계급의 구별이 없이 도성사람과 여염(閭閻)의 서민층 사람들까지 모두 나와서 행렬이 인해인성(人海人城)을 이루었다. 여기에다 생소(笙簫 : 생황과 소)를 불고 북까지 울리며 요란스럽고 호화스러워서 극치의 장관을 이루었었다고 한다.
≪열양세시기≫에는 열두 다리를 밟는다고 명시한 것과 사월초파일에도 답교를 했다는 기록이 다른 점이다. 그리고 기록에서 부녀자들은 매년 정월 초하루나 15일을 기해서 3일 밤 혹은 16일 밤에만 부녀자들이 답교를 했다고 되어 있다.
송파 지역의 다리밟기는 타 지역과 달리 놀이로 변형되어 행해진 민속놀이라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최소한 120여 년 이상의 전통성을 지니고 있으며 근래까지 몽촌(夢村)과 송파에만 전승되고 있다. 이 놀이는 정월대보름을 전후해서 3일간 놀았으며, 1925년 정월까지도 대단히 성대하게 행하여졌는데, 그 해 여름 대홍수가 나서 중단되었다고 한다. 그뒤 1959년 제1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전을 계기로 다시 복원되어 전승되고 있다.
송파다리밟기가 언제부터 놀이화되었는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전하는 말에 의하면 삼정승 육판서가 다리만 밟고 끝낼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여흥을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가무별감(歌舞別監)을 시키어 답교를 한 뒤에 놀기 시작하게 된 뒤부터라고 한다.
그런데 실제 조사자료에 의하면 송파다리밟기를 놀던 곳에는 다리가 전혀 없는 곳이고, 이 놀이를 하면서 다리를 밟고 왕래한 적도 없었다는 것으로 보아, 이 놀이는 세시풍속의 다리밟기에 영향을 받기는 하였지만 그 영역을 완전히 이탈해서 민중의 오락적인 놀이로 변모되어 전승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송파다리밟기의 등장인물은 상좌무동(1) ·2층 무동(4) · 무동(4) · 소무(4) · 상좌(1) · 왜장녀(1) · 양반(1) · 나쟁이(사령)(1) · 집사(2) · 별감(2) · 선소리(4) · 제금(1) · 장고(1)호적(1) · 나쟁이(1)의 순서로 등장한다. 등장인원 중에는 포수(1)역과 영기(2명) · 황룡기(1) 등이 더 있다고도 한다.
놀이 형태는 처음에 일렬로 굿거리장단에 춤을 추며 등장하며 원을 만든 다음, 크게 둥근 형태, 2열 종렬, 1열 횡렬 등으로 질서가 없이 벌려 서기도 하고 나쟁이는 주위에서 몰려드는 군중들을 막고 정리도 하며 춤춘다. 특히 상좌는 2열 종렬(2열병렬)의 무동(소무)를 어르고 춤추다가 두 손을 무동 어깨 위에 얹고 춤추며 위치를 교환시킨다.
이 놀이의 연희자들은 송파 탈춤의 탈꾼들이 상당수 참여하고 있다. 무용(소무)과 상좌무동은 여자 역이어서인지 산대 탈춤의 소무의 춤가락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고, 상좌 역시도 산대 탈춤에 있는 ‘깨끼리’가락 등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또한 선소리 산타령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1989년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