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시 ()

대동여지도 중 경기도 수원 및 남부 일원 부분
대동여지도 중 경기도 수원 및 남부 일원 부분
인문지리
지명/행정지명ˑ마을
경기도 중남부에 위치한 시.
이칭
이칭
매홀, 수성
정의
경기도 중남부에 위치한 시.
개관

동북쪽과 동쪽은 용인시, 서쪽과 남쪽은 화성시, 서북쪽은 의왕시에 접하고 있다. 동경 126°55′∼127°05′, 북위 37°13′∼37°20′에 위치한다. 면적은 121.04㎢이고, 인구는 118만 4624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4개 구, 42개 행정동(56개 법정동)이 있다. 시청은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에 있다.

자연환경

광주산맥의 발달부인 광교산맥이 통과해 곳곳에 높고 낮은 구릉이 나타난다. 지형은 대체로 동북에서 남서 방면을 향해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동쪽은 광교산(光敎山, 582m)·형제봉(兄弟峰, 448m), 서쪽에는 칠보산(七寶山, 236m)이 화성시와, 북쪽에는 백운산(白雲山, 567m)이 의왕시·용인시와 경계를 이룬다. 중앙에는 숙지산(熟知山, 123m)·팔달산(八達山, 143m)·여기산(麗妓山, 105m)이 있다.

하천은 광교산에서 발원한 장지천(長芝川)·원천천(遠川川)·수원천(水原川)이 남류해 황구지천(黃口池川)에 합류한 뒤 남류한다.

지질구조는 화강암과 화강편마암이 전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기후는 연평균 기온 11℃, 1월 평균기온 -5.6℃, 8월 평균기온 26℃이며, 연 강수량은 1,327㎜이다. 10월 초에 첫서리가 내리고 4월 하순에 마지막 서리가 내린다.

역사

권선구 서둔동 여기산 일대에서 토기·쇳조각·돌화살촉조각 등 청동기시대 전기로부터 초기철기시대에 이르는 유물들이 다수 발굴되었다. 이로써 청동기시대에 사람들이 집단생활을 영위했던 주거지로 밝혀졌다.

특히, 광교산과 꽃뫼의 산신제의 유습이 이 사실을 증명해 준다.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모수국(牟水國)이 수원 일대였다고 한다. 삼국시대에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점유하고 있던 5세기 말엽에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까지 고구려의 매홀(買忽: 맷골, 물골)로 불렸다.

수원(水原)이라는 이름은 모수국이라는 데서 연유해, 볼물·벌물이라는 뜻으로 지금까지 내려온다. 통일신라 때인 757년(경덕왕 16) 9주를 두고 군현으로 명칭을 고칠 때 수성군(水城郡)이라고 개칭하였다.

태조가 후백제를 치기 위해 남정(南征)할 때 군인(郡人) 김칠(金七)·최승규(崔承珪) 등 200여 명이 귀순해 왔다. 그 공으로 940년(태조 23) 수주(水州)로 승격되었다. 그 뒤 995년(성종 14)에는 도단련사(都團練使)를 두었다가 1005년(목종 8)에 혁파하였다. 이때 이름을 한남(漢南) 또는 수성(隋城)이라 하였다.

1018년(현종 9) 지수주사(知水州事)를 두었고, 안산(安山)·정송(貞松)·용성(龍城)·영신(永新)·쌍부(雙阜) 등의 현(縣)이 내속되었다. 1271년(원종 12) 몽고병이 대부도에 쳐들어왔을 때 섬사람들이 몽고병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니 부사 안열(安悅)이 이를 평정하였다. 그 공으로 수원도호부로 승격되었다.

뒤에 인주(仁州: 지금의 仁川)에 붙였다가 곧 수주목으로 고쳤다. 1310년(충선왕 2) 목의 지위에 있는 모든 고을을 폐할 때 수원부로 강등되었다. 그 뒤 1362년(공민왕 11)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고을사람들이 이를 맞아들여 양광도에서 가장 먼저 항복하였다. 그래서 다시 군으로 강등되었다. 이에 고을사람들은 재신 김용(金鏞)에게 뇌물을 바쳐 다시 부로 승격되었다.

1395년(태조 4)에 수원부가 양광도에서 경기도로 편입되었으며, 1413년(태종 13) 도호부가 되었다. 1456년(세조 2) 진(鎭)을 설치하고 판관을 두어 서울의 수호를 튼튼하게 하는 보제도(輔制度)의 한 곳이 되었다.

1526년(중종 21) 고을사람이 부모를 죽인 사건이 일어나서 군으로 강등되었다. 그리고 진이 혁파되어 인천으로 옮겨졌다가 1535년에 다시 진으로 복구되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1789년(정조 13) 양주 배봉산(拜峯山)에서 수원 읍치의 진산인 화산(華山)으로 옮겼다. 그런 다음 이곳에 있던 읍치를 모두 지금의 팔달산 밑으로 옮겼다.

이때 수원향교도 봉담면 와우리에서 옮겨 왔다. 그리고 1793년에는 수원부를 화성유수부(華城留守府)로 승격시키고 유수로 하여금 장용외사행궁정리사(壯勇外使行宮整理使)를 겸하게 하였다. 또한 정약용(丁若鏞)이 활차(滑車: 도르래)로 거중기(擧重機)를 만들고 녹로(轆轤)를 사용해 각종 시설을 고루 갖춘 수원성을 쌓았다.

1895년(고종 32)에 지방관제가 바뀌어 군이 되었다. 이듬해 경기도관찰부의 소재지가 되었다가 1910년에 서울로 이전되었다. 이때 화령전(華寧殿)에 모셨던 정조의 진영도 서울로 옮겨가니 군민들은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수원군읍지』에 따르면 1899년의 호구 수는 1만 2579호, 4만 9708명(성내 956호)에 40면 449리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섬을 제외한 남양군을 폐합해 수원면이 되었다가 1931년 읍으로 승격되었다.

근대 인물로는 3·1독립운동에 앞장서서 활약했던 교육가 김세환(金世煥)과 3·1독립운동과 항일민족운동에 몸바쳐 일하다 붙잡혀 복역한 이선경(李善卿)이 있다. 또한 서양화가·여류문학인이었던 나혜석(羅蕙錫)도 이 고장 출신이다.

1949년 8월 15일에 시로 승격됨에 따라 수원군의 다른 지역은 화성군으로 개칭되었다. 1963년 1월 1일 화성군의 20개 리를 편입하였다. 같은 해 서울에 있던 경기도청의 이전이 결정되어, 1964년 10월 15일 도 청사를 신축에 들어가 1967년 6월 23일 완공하였다.

기공 당시에 ‘수원시민의 날’을 제정하고, 이를 경축하는 화홍문화제(華虹文化祭)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기리는 효의 상징도시로서 전국 시·도에서 추천된 효행자를 표창하고 있다.

1983년 2월 15일 용인군 수지면 이의리와 하리를, 1987년 1월 1일 화성군 매송면 금곡리와 호매실리를 편입하였다. 1988년 7월 1일 권선구와 장안구를 설치했으며, 1993년 2월 1일에는 팔달구가 신설되었다.

1994년 12월 26일 화성군 반월면 일부와 태안읍 일부, 그리고 용인군 기흥읍 일부를 편입하였다. 그리고 1995년 4월 20일에는 화성군 태안읍 신리·망포리 일원을 편입하였다. 도청의 이전과 함께 각종 기관·단체의 이전으로 도 행정의 중심도시가 되었다. 2003년 11월 24일 영통구가 신설되었다.

따라서 많은 교육기관과 산업체를 유치하는 등 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 그리고 농업과학의 중심이 되었다. 또한 동수원에 신도시를 형성, 개발해나가는 등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유물·유적

수원 여기산 선사유적지(경기도 기념물, 2005년 지정)에서 토기·쇳조각·돌화살촉조각 등 초기철기시대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또한 교동에 수원 팔달산 지석묘군(경기도 기념물, 1991년 지정)이 있다.

고려 정종의 스승이었던 진각국사의 수원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보물, 1963년 지정)가 광교산 창성사지에서 팔달구 매향동으로 옮겨 세워져 있다. 우만동에 수원 봉녕사 석조삼존불(경기도 유형문화재, 1994년 지정)·수원 봉녕사 불화(신중탱화, 현왕탱화)(경기도 유형문화재, 1994년 지정)가 있고, 현존하는 사찰로는 봉녕사·청련암(靑蓮庵)·팔달사(八達寺) 등 30여 개가 된다.

장안구 하광교동에는 여조궁허지(麗朝宮墟址)·여조하창지와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전라병사 김준룡(金俊龍)이 청나라군를 무찔러 전승을 거둔 것을 기념한 김준룡장군 전승지 및 비(경기도 기념물, 1977년 지정)·호항골[胡降谷]·거적바위[拒敵巖] 등이 있다.

한편, 1950년 북한의 남침으로 희생된 영령들을 모신 현충탑이 팔달구 매향동에 있으며, 당시 청년들이 조직한 대한청년단이 주축이 되어 지방 공산당에 대항해 시 전역을 지켜 싸우다 희생된 37명의 순국동지를 위해 세운 위령탑이 팔달산에 있다. 화서동에 수원 축만제(경기도 기념물, 2005년 지정) 등의 문화재가 있다.

1789년(정조 13)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 배봉산에서 화산으로 이장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있던 수원읍치를 현재의 팔달산 밑으로 옮기고 성곽과 각종 누문들을 건립하였다. 이때부터 수원읍치는 현 위치로 바뀌었으며, 수원 성곽[華城] 전체는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이 밖에도 수원성 주변에는 누대가 많이 있다. 장안구 장안동에 수원 화서문(보물, 1964년 지정), 신풍동에 수원 화령전(사적, 1963년 지정)·수원 화성행궁(사적, 2007년 지정) 등이 있다. 그리고 파장동에 지지대비(경기도 유형문화재, 1972년 지정)가 있다.

또한, 팔달구 팔달로2가에 수원 팔달문(보물, 1964년 지정)·팔달문 동종(경기도 유형문화재, 1976년 지정)이 있고, 남수동에는 봉돈(烽墩)이라 불리는 수원성의 봉화대가 있다.

수원 광주이씨 고택(중요민속문화재, 1984년 지정), 권선구 교동에 화양루, 장안구 정자동에 산일정(山一亭), 화서동에 항미정(杭眉亭), 연무동에는 군사들의 훈련장이었던 연무대(鍊武臺)가 있다. 이외에 팔달구 매향동에 아담스기념관(경기도 기념물, 2001년 지정)이 있다.

영통구 이의동에 심온선생 묘(경기도 기념물, 1979년 지정) 등이 있고, 유교문화재로는 권선구 교동에 수원향교(경기도 문화재자료, 1983년 지정)가 있다.

경기도 도당굿(국가무형문화재, 1990년 지정)과 승무, 살풀이춤(경기도 무형문화재, 1991년 지정)·소목장(경기도 무형문화재, 2006년 지정)·단청장(경기도 무형문화재, 1999년 지정)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장안구 파장동에 노송지대(경기도 기념물, 1973년 지정)가 있으며, 상광교동과 하광교동에는 보호수로서 수령 500년이 넘는 느티나무가 각각 한 그루씩 있다.

교육·문화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는 수원향교가 있었다. 본래 화성군 봉담면에 있었으나, 1789년 수원성곽을 축성하고 수원을 팔달산 일대로 옮길 때 현재의 교동으로 이전하였다. 이 밖에 매곡서원(梅谷書院)이 있었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철폐되었다. 그리고 곳곳에 서당이 있어 지역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1896년에 경기도 관찰부공립소학교가 최초로 설립되었다. 1902년에는 북감리교회에 삼일학당이 설립되어 그 뒤 삼일여학교와 삼일학교로 분리되었다. 1904년에는 농상공학교(農商工學校)가 설립되어, 1906년에 수원농림학교(水原農林學校)로 개칭되어 발전하였다. 1909년에는 수원상업강습소(水原商業講習所)가 개설되는 등 일찍부터 실업교육에 힘썼다.

그 뒤 학교 수는 크게 늘어나,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97개교, 중학교 56개교, 고등학교 43개교, 특수학교 3개교, 경기대학교·아주대학교·성균관대학교 자연과학캠퍼스와 국제사이버대학교 등이 있다.

도립도서관과 시립도서관이 있어 지역교육과 문화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 1956년에 개원한 수원문화원은 시의 축제인 화홍문화제를 주관하는 등 향토문화 계승과 사회교육에 기여하고 있다.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경기도지부에서는 경기종합예술제와 난파음악제를 매년 개최해 예술문화발전에 힘쓰고 있다.

민속

이 고장의 대표적인 민속놀이로는 줄다리기를 들 수 있는데 특히, 권선구 고색동의 줄다리기는 유명하다. 음력 정월보름날 오후에 행해지며, 동민 800여 명이 나와 성인 남자들이 한편이 되고 부녀자와 청년이 한편이 되어 줄을 당겨 승부를 가리는데, 부녀자편이 이겨야 그 해에 풍년이 든다고 전해진다.

줄은 중심부분의 지름이 1m나 되게 짚을 꼬아서 튼튼하게 만들며 길이는 100m 정도로 길게 만들어서 해를 거듭할수록 상하는 부분은 보완해 쓰고 있다.

줄다리기가 시작되기 전에 동네 가운데에 있는 사당에서 돼지 한 마리를 바쳐 고사를 지낸 다음 동네 농악이 선두가 되어 동민 전체가 어울려 축제분위기를 이룬 다음 비로소 줄다리기가 시작된다.

1920년대에는 수원성 팔달문을 중심으로 문안·문밖에서 5일장이 섰는데, 문안·문밖 사람들이 각각 한편을 이루어 장빼앗기 줄다리기를 했으나 지금은 하지 않는다. 이 밖에 각종 두레놀이를 비롯해 널뛰기·윷놀이·그네뛰기·연날리기·씨름 등이 행해진다.

광교산 산신제는 오랜 전통을 가졌으며, 하광교동 주민들이 매년 음력 10월 그믐날 밤 10시에 행하는 제이다. 산중턱 충의골(忠義谷: 병자호란 때 김준룡이 호군을 물리친 곳)에 제단이 있다.

제상에는 소머리와 신위에게 올리기 위해 현지에서 지은 밥인 교라 등을 올리며 절차가 매우 엄격하다. 특이한 점은 제기를 해마다 새로 장만하는 것이다. 제관으로 10여 명이 선출되어 제의를 집행하고 가구마다 소지를 올려준다.

이 산신제는 지금까지 중단한 일이 없었으며, 산신제가 끝나면 약간의 음식을 차려 먹기도 하지만 굿이나 놀이는 따르지 않는다. 이 밖에도 탑동 성황당에서 칠월 칠석에 당제를 지내며, 거북산 당제는 당집에서 제를 지낸 다음 굿으로 이어진다.

설화·민요

이 고장에는 자연물전설, 장자못 유형의 장자설화, 재치 있는 사신설화, 정조임금과 관련된 설화 등이 전한다. 장안구 연무동과 조원동에 전하는 「퉁수바위전설」은 혈육이 없던 부부의 애달픈 이야기이다.

이들은 자식을 얻기 위해 부인은 조원동의 바위에서, 남편은 연무동의 바위에서 백일기도를 드리기로 하였다. 백일 동안 만나지 못하게 된 이들 부부는 퉁소를 불어 안부를 전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치성을 드리다가 병이 난 부인이 남편의 퉁소소리에도 화답하지 못하게 되었다. 남편이 걱정이 되었지만 백일기도를 마쳤다. 그러나 부인은 이미 죽어 있었다. 그 뒤 두 바위를 할애비퉁수바위·할미퉁수바위라 부르게 되었다.

영화동에는 인색한 장자가 혈을 잘라 망하게 된 설화가 전한다. 백제 때 부마인 우성하라는 부자가 살았는데, 흉년에 동냥하러 온 중에게 양식은커녕 물 한 모금 대접하지 않았다.

중은 물이 귀하다는 우성하의 말에 집 뒤에 있는 거문고 모양의 산을 끊어 수로를 내면 물이 풍족할 것이라 하고 사라졌다. 우성하는 이 말대로 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거문고의 혈을 자른 꼴이 되어 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 고장에는 대황교(大皇橋)라는 다리가 있다. 그런데 중국에서 이 다리 이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 즈음 우리나라에서는 사신을 파견하게 되었는데, 이 사신은 상복으로 채비를 하고 길을 떠났다.

중국에 도착하니 마침 대비가 죽어 상중이었다. 창졸간에 당한 상(喪)인데도 상복을 제대로 차려 입고 들어가자 중국에서는 그 선견지명에 놀라 대황교의 명칭에 관해서는 묻지도 않았다. 그래서 사신으로 갔던 목적을 달성하고 다리이름은 그대로 지속되게 되었다.

또한,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옮기고 수원성을 축조해 이에 관한 설화가 많다. 정조가 헌배하러 갈 때 행군이 더디다고 역정을 낸 지지대고개, 임금의 행차를 지켜 본 당상소나무, 화산릉 주변에 조성해 놓은 송림에 송충이가 번지자 정조가 송충이를 입으로 깨물었다는 설화 및 수원성 축조에 관한 전설 등이 그것이다.

명의 정광현은 육체의 병뿐 아니라 마음의 병까지 고친 사람이다. 급체한 부인네를 장정들이 홑이불 위에서 이리저리 굴려 낫게 하는가 하면, 수원에 유수로 온 관리의 불면증에 ‘귀향’이라는 처방을 내려 집으로 돌아가게 하니 과연 병이 나았다 한다.

그 밖에도 정조를 잃은 한 처녀가 묻힌 무덤에서 꽃이 피어났다는 「꽃뫼전설」·「교구정의 용바위전설」, 고색동의 「배다리전설」 등이 전한다.

이 고장에 구비 전승되는 민요는 타령요와 무속신앙요·여요 등이 많다.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사발가」·「백발가」·「사모요」·「해달노래」 등을 들 수 있다. 「사발가」는 경기도 지방에서 애창되는 대표적인 것으로 후렴이 흥겨우나 가락은 느리고 애상적이다.

“에헤에 헤야 에여라 난다 디여라 네가 내사랑아(후렴)/석탄백탄 타는데 연기는 푸불숙 나는데/(후렴 생략)/요내 가슴 타는데 연기도 김도 안난다.” 이 구절은 일제강점기의 민족의 설움을 잘 대변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해달노래」는 해와 달을 소재로 해 임금님에 대한 충성심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노래다. 이 지방 특유의 음영민요로 문답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4·4조가 기본운율이다. 그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저 나무 무슨 나무요/해도 돋고 달도 돋아/해는 따서 초마(치마) 짓고/달을 따서 쌍무지개/쌍근달어 우리나라/금방님께 바치리라.” 그리고 「사모요」는 다른 지방의 것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백발가」(청춘가)는 뛰어나다. 그 앞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어화 청춘 소년님네 백발 보고 웃지마소/나도 어제 청춘이더니 오늘 백발 한심하다/장안에 일등미색 곱다고 자랑마소/서산에 지는 해는 그 뉘라서 금지하며/창해로 흐르는 물 다시오기 어려워라.” 이 노래는 늙어감의 불가항력을 자연의 섭리에 비유한 노래로 기교가 뛰어나다.

산업·교통

전 토지의 16.2%가 경지이고 21.4%가 임야이다. 경지 중 논이 1,184㏊, 밭이 783㏊를 차지한다. 신대·원천·광교·일원·일왕 저수지 등이 흩어져 있으며, 이들이 관개용수·공업용수·생활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감자 이외에, 밭작물로 배추·무·상추·호박·오이, 특용작물로 참깨, 과실류로는 포도·배 등이 생산된다. 수원은 과거 농업의 중심지였으나, 농산물은 주곡 및 일반 채소류에서 고급 원예작물로 점차 바뀌고 있다.

최근 대학교와 연구소 등이 수원시로 이전하면서 도시지역이 확대되고 농경지가 줄어들면서 2·3차 산업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 과거 농촌진흥청,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농업시험장, 농업기술연구소 등 농업관련 연구기관이 있어 우리나라 농업발전을 주도하였으나 현재는 관련기관 대부분이 다른 지역으로 이전하였다.

농가인구는 전체 인구의 0.9% 정도이다. 수원은 옛날부터 딸기 재배가 유명하였다. 그러나 생산지역은 감소하고 생산량도 줄고 있다.

제조업 인구는 전체 인구의 4%인 4만 2209명이다. 주요 제조업은 조립금속기계업·화학공업·섬유공업·비금속공업과 종이·인쇄공업 등이 발달하고 있다. 전체 산업의 80% 이상이 중소업체이다. 3차 산업이 활발해 상업시설이 많다. 시장 34개, 백화점 4개, 대형 마트 8개, 쇼핑센터 6개가 있다. 과거에는 수원에 정기시장이 유명했으나 상설시장의 발달로 없어졌으며 전통적인 우시장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도로는 경부고속도로가 동쪽에서 남북으로 지나고, 국도 1호선이 시의 중심부를 남북으로 지난다. 또한 국도 42호선이 시의 중심부를 동서로 지나며, 국도 43호선이 서남부 화성시에서 들어와 권선구를 지나 동부의 용인시로 들어간다.

철도는 경부선이 국도 1호선과 나란히 남북으로 지난다. 협궤철도인 수인선이 국도 43호선과 나란히 서진하였으나 1994년 이후 없어졌다. 서울∼수원 간은 전철이 지나고 있어 수원은 서울의 통근권이 되었다.

관광

시의 중앙부에는 팔달산이 솟아 천연적 공원을 조성하고, 서호를 끼고 도는 여기산은 병풍처럼 이어 내려 북서풍을 막아주고 있다. 동남부에는 넓은 평야가 발달해 농업과학을 위주로 한 각종 산업발달의 근거지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수원시는 그 지형이 아담하고 풍경이 아름답다. 그래서 500년간의 고려왕도였던 개성과 비유된다. 서울에서 남쪽으로 불과 42㎞ 거리에 있는 이곳은 정치·경제·문화·사회·경제·교육·산업 부문에서 서울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수원의 옛 이름은 수성·화성이며, 조선시대에는 유수부를 두었다. 1919년까지는 도관찰부를 두어 다스리기도 하였다. 특히, 수원은 왕도가 될 뻔했던 고적의 도시요, 이름난 관광도시이다.

화성은 정교한 아름다움을 지녀 세계적으로 고고학·미술사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화홍문·방화수유정·수원 팔달문·수원 화서문, 조선시대 성곽의 표본인 산성, 천년 고찰로 알려진 용주사 등이 시역 주변에 산재해 있다.

조선 정조의 부친인 사도세자는 신체적인 결함과 세자로서의 행실이 옳지 못해 부왕의 노여움을 사서 비참한 죽임을 당했다. 이에 정조는 원혼을 달래기 위해 능을 양주 배봉산에서 화성군 화산으로 옮기는 한편, 수도를 수원으로 옮기려는 천도 계획까지 세웠다.

따라서 화성축성을 비롯한 많은 성문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로 오늘날 수원은 고적 명승지의 고적이 풍부한 도시가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의 성곽도시 수원은 오늘날에도 효원의 도시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전국적 효자·효부들에게 매년 표창식을 거행하는 등 효심의 상징도시로 유명하다.

그 외 수원 8경은 꼭 한번 가볼 만한 곳이다. 수원 8경이라 함은, 첫째가 수원시 북쪽 광교산의 눈 덮인 아름다운 경치이고, 둘째가 장안문 북쪽 연못에 핀 우아한 연꽃이다. 셋째는 광교산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과 물보라이며, 넷째는 홍화문 동쪽편의 달 떠오르는 광경이다.

다섯째는 수원천의 긴 제방 양편에 늘어선 수양버들이며, 여섯째는 팔달산의 울창한 숲에서 아지랑이처럼 모락모락 올라오는 산기(山氣)이다. 일곱째는 서호 수면에 황금빛 노을진 아름다움이며, 여덟째는 진달래꽃으로 붉게 물든 화산(花山)의 아름다움을 말한다.

구(區)
  1. 권선구(勸善區)

시의 남서부에 위치한 구. 면적 47.17㎢, 인구 35만 1053명(2015년 현재). 구청 소재지는 탑동이다.

본래 수원군과 화성군 지역으로, 1988년 행정구역이 기존의 동(洞)에서 구(區)로 바뀔 때, 장안구와 함께 신설되었다. 그리고 12개 동으로 편제한 뒤 명칭을 권선구라 하였다.

1987년 화성군 매송면 금곡리를 서둔동으로, 호매실리를 평동으로 편입하였다. 1990년 매탄동이 매탄1·2동으로, 같은 해 매탄3동이 분동되었고, 1991년 서둔동에서 구운동이 분리되었다.

1993년 팔달구가 신설될 때 5개 동이 분동되었고, 1994년 화성군 반월면(半月面) 입북(笠北)·당수리(棠樹里) 일원을 신설된 입북동에 편입하였다. 그리고 1995년 곡선동에서 권선동이 분동해 관할 동이 12개로 되었다. 2003년 11월 24일 영통구 개청시 매교·매산·고등동이 팔달구로 편입되고 2016년 1월 11일 금호동이 금곡동과 호매실동으로 분동되었다.

북쪽에 여기산(麗妓山, 105m), 남서쪽에 칠보산(七寶山, 239m), 남쪽에 고금산(古琴山, 86m) 등이 있으나 전 지역이 낮은 구릉성 산지에 가까운 지형이다. 하천으로는 황구지천(黃口池川)·서호천(西湖川)·원천리천(遠川里川) 등이 있다. 동부의 수원천(水原川)은 복개 1단계 공사가 마무리되어 일부 지역이 시중 도로로 활용된다. 이들 하천은 모두 구의 남북 방향으로 종단한다.

거의 전 지역이 도시화되어 있는 가운데 수원시에서 농가인구가 상대적으로 가장 많고, 논·밭의 경지면적이 제일 넓다. 축산업으로 한우·젖소·돼지·닭·오리 등이 사육되는데, 특히 한우·젖소·돼지 사육수는 시 전체에서 두드러지게 많다.

제조업을 중심으로 각종 산업시설이 집중되어 있는 까닭에 관련 종사자들도 수만 명에 달한다. 지역적인 특징은 경기도청·수원비행장이 위치한 행정·농업·안보의 핵심지역임과 동시에 수원역·버스터미널 등 교통의 요충지에 해당해 꾸준히 인구가 늘고 있다는 점이다.

더욱이 도시의 색채만이 가득한 수원시에서 도시와 농촌이 일정하게 병존해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두루 갖춘 곳이기도 하다. 교통은 경부선 철도와 함께 수도권 전철이 동부 지역을 남북으로 종단하면서 수원역을 통과한다. 그리고 수원∼인천을 연결하는 수인선 철도가 이곳에서 합류한다.

1번 국도가 의왕시와 화성시를 남북으로 연결되어 구 동부를 종단한다. 그리고 42·43번 국도가 구의 동서남북을 종횡으로 연결한다. 기타 여러 시도와 도로망이 형성되어 교통이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교동에 팔달산 지석묘군과 화성축성 당시 화성군 봉담면에 있던 것을 이전해 중창했다는 수원향교가 있다. 그리고 서둔동에 항미정(杭眉亭)이 있다.

세류(細柳)·장지(長芝)·평(坪)·고색(古索)·오목천(梧木川)·평리(坪里)·호매실(好梅實)·서둔(西屯)·탑(塔)·구운(九雲)·금곡(金谷)·권선(勸善)·입북(笠北)·당수(棠樹)·곡반정(谷泮亭)·대황교(大皇橋) 등 16개 동이 있다.

  1. 장안구(長安區)

시의 북부에 위치한 구. 면적 33.34㎢, 인구 29만 9016명(2015년 현재). 구청 소재지는 조원동이다.

본래 수원군과 화성군의 지역으로 1988년 행정구역이 기존의 동(洞) 체제에서 구(區) 체제로 바뀔 때, 권선구와 함께 12개 동으로 개청하면서 구의 명칭을 장안구라 하였다.

장안이라는 명칭은 이곳에 위치한 화성의 북문을 통해 한양으로 드나들 수 있었다 해 붙여졌다고 한다. 구 설치 이후 많은 행정구역 개편이 단행되었다. 1990년 파장동을 파장동과 율천동으로, 정자동을 정자1·2·3동으로, 지만동을 지동과 우만동으로 분동하였다. 또한, 같은 해 5월 송원동(松園洞)을 송죽동과 조원동으로 분리, 운영하였다.

1992년 조원동 일부를 영화동으로, 영화동 각 일부 지역을 조원동과 연무동으로, 연무동 일부를 우만동으로 편입시키는 등 행정구역 개편이 있었다. 이어 1993년 2월 수원시에 팔달구가 신설될 때, 관할구역인 팔달·남향·지·우만·이의 등 5개 동이 이관되었다. 2003년 11월 24일 영통구 신설로 인하여 신안동, 화서1동, 화서2동이 팔달구로 분리되었고, 조원동이 조원1·2동으로 분리되었다.

북쪽에 광교산, 북동쪽 경계에 형제봉, 남쪽에 숙지산과 함께 화성 성곽을 둘러싼 팔달산이 있다. 또한 북부에 광교천이, 남동부에 영화천(迎華川)이 흐르면서 사방 곳곳에 저수지를 형성하는데, 광교·파장·서호·일월(日月)·일왕(日旺) 등의 저수지가 있다.

거의 전 지역이 도시화되어 있어서 시 전체에서 경지면적이 가장 적고 특별한 농산물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1차 산업은 미미하다. 남부는 상공업 발달의 중심지로 일찍부터 자리 잡았고, 많은 제조업체가 분포한다. 특히, 중심부에 건립된 공설운동장은 야구·축구·농구 등의 프로 스포츠는 물론 각종 체육행사를 개최해 공공휴식처로 자리 잡았다.

지역적인 특징으로, 시의 북부 관문에 위치해 교통의 요충지이다. 따라서 고속도로와 국도, 그리고 서부우회도로 등 수도권 및 서해안 배후도시로서의 교통량 분산지 역할을 담당한다. 수원팔경의 하나인 광교산이 북쪽으로 병풍처럼 드리워져 있고, 시민의 보조식수로 활용되는 광교저수지와 수원천이 흐르는 환경 친화적인 요소를 두루 갖춘 지역이다.

또한, 이곳은 수원 화성행궁 및 수원 장안문·수원 화서문 등 화성의 주요 문화재와 종합운동장·실내체육관·야구장 등 종합체육시설이 집중되어 전통문화와 현대적인 관광스포츠를 동시에 즐길 수 있다.

교통은 경부선과 전철인 성균관대역과 화서역 등 2개 역이 있어서 수많은 통학생과 직장인들을 실어 나르고 있다. 또한 신갈∼인천 간의 고속도로가 북수원 인터체인지를 지나 구 중심부를 횡단하면서 인천까지 확장되었다. 그리고 1번 국도가 북서부에서 남동부를 종단하고, 43번 국도가 남동쪽 팔달구와 경계를 이루면서 1번 국도와 연결된다. 이 외에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수많은 도로망이 발달해 있다.

문화유적은 조원동에 청연암(靑蓮庵), 장안동에 수원 화서문(水原 華西門), 파장동에 이재원선생 불망비(李載元先生 不忘碑)와 수원 광주이씨 월곡댁, 하광교동에 김준룡장군 전승지(金俊龍將軍 戰勝地) 및 비(碑), 신풍동에 수원 화성행궁(水原 華城行宮) 낙남헌(洛南軒)과 화령전(華寧殿), 상광교동에 수원 창성사지(水原 彰聖寺址) 등이 있다.

영화동 소재 장안공원은 장안문에서 성벽을 두고 화서문까지 이어져 있으며, 시민 휴식공간이자 다양한 행사가 개최된다. 파장동 지지대고개의 효행공원은 정조의 효를 후세에 알리고 시민들의 휴식 공간 마련을 위해 조성되었으며, 효행기념관·정조대왕동상 등이 있다.

아울러, 공원 인근에 조성된 노송지대는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며 수원의 상징으로 부각된다.

조원(棗園)·파장(芭長)·이목(梨木)·천천(泉川)·율전(栗田)·정자(亭子)·영화(迎華)·송죽(松竹)·연무(鍊武)·상광교(上光敎)·하광교(下光敎) 등 11개 동이 있다.

  1. 팔달구(八達區)

시의 중부에 위치한 구. 면적 12.86㎢, 인구 19만 9180명(2015년 현재). 구청 소재지는 매향동이다.

본래 수원군과 화성군 지역으로, 1993년 장안구와 권선구의 일부 지역을 편입해 10개 동으로 신설되었다.

같은 해 12월 우만동을 우만1·2동으로 분동하였다. 1994년 7월 매탄2동을 매탄2·4동으로 분동했으며, 12월에 용인군 기흥읍 일부와 화성군 태안읍 일부 지역을 원천동으로 편입시켰다. 그 뒤 1995년 4월에 화성군 태안읍 신리(莘里)·망포리(網浦里)를 매탄3동으로 편입하였다. 2003년 11월 24일 영통구의 신설로 매탄1·2·3·4동, 태장동, 원천동, 영통1·2동, 이의동이 분리되어 현재의 행정구역을 갖추었다.

팔달이라는 명칭은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八達門)에서 유래하였다. 하천으로 북부에 여천(麗川)과 동부에 계산천이 흐르며, 동쪽에 원천·신대(新垈) 저수지가 있다. 일부 논농사를 주로 하는 농가가 있지만 그 숫자는 미미한 정도이고, 돼지·닭·산양·오리 등을 사육하는 축산농가도 분포한다.

무엇보다 이 지역의 특징은 각종 산업시설이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제1의 대기업 산하 4개 계열사가 집중되어 있는 전자공업의 중심지이며, 각종 제조업체가 다수 분포한 관계로 산업체 종사자 숫자만도 10만 명이 훨씬 넘는다.

1980년대 초 이후 늘어나는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동수원개발계획을 수립해 주거지가 매탄동에서 점차 동쪽으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제일 늦게 분구된 지역이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1990년대 이후 새로운 시가지로 급속도로 발달하고 있는 지역이 많다.

특히, 시청이 소재한 인계동은 대단위아파트·금융기관·대형백화점·병원과 주요 일간 신문사 등 각종 주요 시설이 집중된 신흥 시가지에 해당한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원천동 영통택지에 대한 개발로, 대단위 아파트가 조성되어 영통구가 생기는 계기가 되었다.

지역여건으로 2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화성과 자연녹지공간 속에 조화를 이루는 원천유원지가 소재한데다, 민속촌·에버랜드가 인접해 관광개발의 적지에 해당한다. 여기에 대형백화점 등이 밀집한 상업의 중심지역이고, 수원시청·수원지방법원 및 검찰청 등이 소재한 행정의 중심지 기능도 담당한다.

교통은 신갈∼인천 간의 고속도로가 동수원 인터체인지를 지나 구 북부를 횡단하면서 경부고속도로와 합류한다. 또한, 43번 국도가 북부를 횡단해 북동쪽 장안구와의 경계를 따라 계속 이어진다.

그리고 42번 국도가 구 중앙을 횡단하고 1번 국도가 구 서부 일대를 종단한다. 이들 3개의 국도는 구의 서쪽에서 서로 교차하면서 기타 여러 지방도 및 시도와 거미줄 같은 도로망으로 얽혀 있다.

문화유적은 매향동에 수원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水原 彰聖寺址 眞覺國師塔碑), 팔달로2가에 흔히 남문이라고 불리는 수원 팔달문(水原 八達門)과 팔달문 동종(八達門 銅鐘), 팔달로3가에 팔달사(八達寺)가 있다.

또한, 우만동에 수원 봉녕사 석조삼존불(水原 奉寧寺 石造三尊佛)과 수원 봉녕사 불화인 신중탱화(神衆幀畵)와 현왕탱화(現王幀畵) 등이 있다.

이 밖에 인계동 문화예술회관 뒤쪽에 자리 잡은 효원공원은 시민들의 휴식처로 꾸며져 있다.

인계(仁溪)·팔달로1가(八達路1街)·팔달로2가·팔달로3가·남창(南昌)·영(榮)·중(中)·구천(龜川)·남수(南水)·매향(梅香)·지(池)·우만(牛滿)·북수(北水)·장안(長安)·신풍(新豊)·매교(梅校)·교(校)·매산(梅山)1가·매산2가·매산3가·고등(高等)·화서(華西) 등 22개 동이 있다.

  1. 영통구(靈通區)

시의 동부에 위치한 구. 면적 27.67㎢, 인구 33만 5375명(2015년 현재). 구청 소재지는 매탄동이다.

본래 수원군과 화성군 지역으로, 1993년 장안구와 권선구의 일부 지역에 편입되어 있었다. 1994년 12월 26일 영통·영덕 택지개발지구 사업에 따라 신도시로 개발되었으며, 2003년 11월 24일 매탄1·2·3·4동, 원천동, 이의동, 영통1·2동, 태장동 등으로 영통구를 신설하였다. 2019년 4월 태장동을 망포 1ㆍ2동으로 분동하였다.

영통이라는 명칭은 마을의 지형이 염통처럼 생겼다 하여 염통 혹은 영통이라 한 데서 비롯된 지명이며, 이와는 달리 영덕, 하갈, 영통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해발 191.1m의 청명산 봉우리에 있는 우물속의 보물이 영(靈)과 통(通)하는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어 그 주변의 마을을 영통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데에서 유래하여 영통구(靈通區)라는 구명(區名)을 택하게 되었다.

인근 용인시와의 접경지에 해발 191.9m의 청명산이 솟아 있고 구의 중심부에는 자연형 하천인 원천리천이 도심부를 통과하고 있다.

도시구조는 기능적으로 수원 IT산업의 메카도시이자 첨단산업 중심의 미래지향적인 도시로서 삼성전자, SDI 등 첨단기업과 중소기업 종합지원 센터 등이 입지하고 있으며, 향후 나노 특화 팹 센터 및 컨벤션 센터 등이 건립될 이의동 종합개발계획 추진권역이 있어 무한한 발전 잠재력을 내재하고 있다.

수원의 동쪽 관문이자 고속도로가 분기하고 있는 교통의 요충지인 이곳은 경부고속도로, 영동고속도로, 신갈∼안산 간 고속도로의 진입로가 위치하고 있으며, 국도 1호선, 42호선, 43호선 등 주요 간선도로가 도심부를 통과하고 있다.

생활환경의 경우 현대적인 주거기능 중심의 신흥개발지역으로 전형적인 도시권역이다. 영통 지구, 매탄 지구 등 대규모 아파트가 밀집되어 있고 공동주택이 생활공간의 90%를 차지하고 있으며 비교적 생활수준이 안정되어 있다.

자연환경과 함께 휴식·문화·상업기능이 겸비된 균형 잡힌 도시로 약 61만 평의 광교호수공원과 북쪽의 광교산 녹지축과 연결되고 매탄공원, 미관관장 등 크고 작은 문화·체육시설과 영통동 일대 중심상권이 대규모로 형성되어 있다. 특히 최근 광교신도시가 조성되면서 옛 원천유원지와 신대호수 일원이 광교호수공원으로 새롭게 태어나 많은 관광객이 몰려드는 대표적인 관광명소이다. 이곳은 수영장·뱃놀이·수상스키·놀이시설·음식점 등 각종 위락시설과 다양한 볼거리로 많은 관광객이 몰려드는 수도권의 대표적인 관광명소이다. 매탄동의 매탄공원도 축구·테니스·농구 등을 즐길 수 있는 체육공원으로 애용된다. 민속촌·에버랜드가 인접해 관광개발의 적지에 해당한다.

문화유적으로는 이의동에 심온선생 묘, 영동에 거북산당, 하동에 정유선생 묘 등이 있다.

매탄(梅灘)·원천(遠川)·이의(二儀)·하(下)·영통(靈通)·망포(網浦)·신(莘) 등 7개 동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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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지명요람』(건설부국립지리원, 1983)
『경기도지』(경기도지편찬위원회, 1955∼1957)
수원시(www.suwon.n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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