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청년단 ()

근대사
단체
1918년 중국 상해(上海)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
이칭
이칭
신한청년당
목차
정의
1918년 중국 상해(上海)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
개설

일명 신한청년당이라고도 한다.

연원 및 변천

1918년 11월 말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자 새로운 질서의 개편이 요청되었고, 이에 따라 한국의 독립 문제도 해결될 것으로 기대하는 분위기가 독립지사들 사이에 고조되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단체의 조직임을 알고, 이를 구체화시키기로 하였다.

당시 발기인으로 국내에서 망명해 온 김규식(金奎植)·여운형(呂運亨)·김철(金澈)·서병호(徐丙浩)·선우혁(鮮于爀)·조동호(趙東祜)·문일평(文一平)·정인보(鄭寅普)·신규식(申圭植)·신채호(申采浩)·조용은(趙鎔殷)·장덕수(張德秀) 등이 참여하였다.

마침 1918년 12월 15일경 미국 대통령 윌슨(Wilson,T.W)이 중국 정부를 위해 파견한 특사 클레인(Clain)이 상해에 왔다. 그는 “개막이 임박한 파리강화회의는 특히 약소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니, 대표를 파견하여 주장함이 좋을 것이다.”고 연설하였다.

이에 여운형·조동호·장덕수 등은 이 기회에 한국의 독립을 달성해야 한다는 의지로 장문의 글을 작성하였다. 그리고 강화회의에 전달해 달라는 주문과 함께 한국 대표도 참석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으나 즉각 회답은 받지 못하였다.

신한청년단은 우선 자체의 조직을 강화하고 독립활동을 용이하게 주도하기 위해 부서와 인선을 정하였다. 이사장으로 서병호를 추대하고 이사로는 여운형·김구(金九)·이광수(李光洙)·안정근(安定根)·조동호·한원창(韓元昌)·한진교(韓鎭敎)·선우혁·김순애(金淳愛) 등이 선임되었다. 재무부·교제부·토론부·체육부·출판부·서무부 등 6개 부서에 회원은 150여 명이었다.

신한청년단은 외교에 능한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로 파견하고, 여운형을 노령으로, 장덕수를 일본으로, 선우혁·김철·서병호 등을 국내로 파견, 이들과 긴밀하게 연락을 취하면서 세계정세 변화에 따른 대책을 협의하였다.

김규식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뒤 파리위원부를 설치, 독립운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장덕수는 일본에서 2·8독립선언을 촉진시켰고, 국내로 들어온 선우혁은 관서 지방의 기독교인과 손을 잡은 뒤 3·1운동을 일으키도록 분위기를 조성해 주었다. 이로 인해 상해는 독립운동의 본부격이 되어 2·8독립선언에 참석했던 이광수와 최근우(崔謹愚)가 달려왔고, 여운형과 동생 운홍(運弘)도 노령과 미국으로부터 도착하였다.

국내에 파견되었던 선우혁·김철·서병호와 현순(玄楯)·최창식(崔昌植) 등도 모였다. 그 밖에 이봉수(李鳳洙)·강대현(姜大鉉)·안승원(安承源)·김구·김병조(金秉祚)·조상섭·이원익(李元益) 등이 국내에서 달려왔다.

만주와 노령에서는 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조완구(趙琬九) 등 30여 명이 모여 독립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신한청년단의 단강(團綱)은 대한독립·사회개조·세계 대동(世界大同)이었고, 『신한청년보(新韓靑年報)』를 기관지로 발간·배포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뒤 30여 명의 신한청년단 핵심 단원들은 1919년 4월 초 1,000여 명의 동포를 배경으로 프랑스 조계의 바오창로(寶昌路) 329호에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하였다. 이것이 뒷날(4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모체가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이후인 1920년 4월 이후에는 민간사업을 경영하였으나 대부분의 인사들이 임시정부의 중요 인물로 활동하였다.

참고문헌

『한국근대민족운동사연구(韓國近代民族運動史硏究)』(신용하, 일주각, 1988)
『대한민국임시정부사(大韓民國臨時政府史)』(이현희, 집문당, 1982)
『독립운동사』 4(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자료한국독립운동사(資料韓國獨立運動史)』 2(추헌수, 연세대학교출판부, 1972)
『몽양여운형(夢陽呂運亨)』(여운홍, 청하각, 1967)
『한국독립사(韓國獨立史)』(김승학, 독립문화사, 1965)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애국동지후원회, 1956)
『한국혼(韓國魂)』(신규식, 1920)
『朝鮮獨立運動』(金正明編, 原書房, 1967)
집필자
이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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