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시 ()

안성군읍지
안성군읍지
인문지리
지명/행정지명ˑ마을
경기도 남단에 위치한 시.
정의
경기도 남단에 위치한 시.
개관

동쪽은 이천시·충청북도 음성군, 서쪽은 용인시·평택시, 남쪽은 충청남도 천안시·충청북도 진천군, 그리고 북쪽은 용인시와 접하고 있다. 동경 127°06′∼127°31′, 북위 36°53′∼37°09′에 위치한다. 면적은 553.41㎢이고, 인구는 18만 199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개 읍, 11개 면, 3개 행정동(33개 법정동), 415개 행정리(158개 법정리)가 있다. 시청은 경기도 안성시 봉산동에 있다.

자연환경

차령산맥의 말단에 위치하고 있어 동북쪽에는 400∼500m의 높은 산이 솟아 있고, 서남쪽에는 100∼200m의 낮은 구릉이 나타나고 있다.

동쪽에는 마옥산(磨玉山, 445m)·묘룡산(妙龍山, 174m)·마이산(馬耳山, 472m)·황색골산(353m)·덕성산(德成山, 521m)·서운산(瑞雲山, 547m) 등이 이천시·충청북도 음성군·진천군과, 서쪽에는 묘봉(妙峰, 229m)·신선봉(神仙峰, 308m)·덕암산(德巖山, 165m)이 용인시·평택시와 경계를 이루고, 북쪽에는 쌍령산(雙嶺山, 491m)·경수산(331m)·딸기봉(415m) 등이 용인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북부 산록지대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안성천(安城川)은 도중에 한천(漢川)을 합류하고 서북부에서 발원하는 도곡천·도량천은 남진하면서 한천에 합류한다. 고남저수지에서 발원하는 한천은 남서진하는 안성천과 합류한다. 군의 중북부에서 발원하는 모두천·기술천 등이 안성천에 합류하고 남부의 금광저수지의 물과 청중천은 서진하면서 안성천과 합류하고 있다.

그리고 안성천은 황구지천(黃口池川)·청룡천(靑龍川)과 합치면서 천안으로 들어간다. 이들 하천은 하천지역에 넓은 충적 평야인 안성평야를 만들고 있다. 동북부에는 청미천이 흐르는데 하천 주변에는 죽산분지가 발달하고 있다.

지질은 화강암과 화강편마암으로 되어 있다.

기후는 대륙성기후에 속한다. 연평균 기온은 11.5℃, 1월 평균기온 -4.9℃, 8월 평균기온 26.6℃이며, 연 강수량은 1,200㎜ 내외이다.

역사

지금까지 이곳에서 구석기시대의 유적이 발견된 바는 없지만 인접지역에서 구석기 유적이 발견되고 있음을 감안할 때 이곳에도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석기시대의 유적은 없으며, 청동기시대의 유적으로는 죽산면 장원리와 삼죽면 내장리·율곡리에서 민무늬토기와 마제석검 등이 출토되었다.

삼한시대에는 진한에 속했으며, 백제 비류왕 초기에는 안성천을 경계로 마한과 국경을 이루어 마한 지역 병탄정책을 실현한 귀중한 병참기지였다. 그 뒤 369년(근초고왕 24) 백제가 마한 전역을 소유하게 될 때까지도 백제의 영토였다.

그 뒤 고구려장수왕이 한강 이남의 백제 영토를 점령하고, 중앙집권적 제도를 실시할 때부터 양원왕 때까지 내혜홀(奈兮忽)로 불렸다. 신라의 삼국통일 후 757년(경덕왕 16) 지방제도가 개혁될 때 백성군(白城郡)으로 개칭되었다.

940년(태조 23) 안성현(安城縣)으로 개칭되었고, 995년(성종 14) 단련사가 두어졌다가 1005년(목종 8)에 폐지되었다. 1018년(현종 9) 수주(水州: 지금의 수원)에 잠시 이속되었다가 뒤에 천안에 이속되었다. 1172년(명종 2) 다시 분리되어 처음으로 감무가 배치되었다.

1236년(고종 23) 몽고군이 침입했을 때 죽주성(竹州城)의 방호별감(防護別監) 송문주(宋文胄)가 죽주산성에 웅거하면서 수주일 동안 선전 분투하여 적을 격퇴시켜 남진을 저지하기도 하였다.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의 침입으로 송도가 유린되고 왕이 안동으로 피난하는 국난을 당했을 때에도, 양광도(楊廣道: 지금의 경기도)의 다른 고을은 모두 항복했으나 이곳 사람들은 계책으로 적에게 거짓 항복하여 주연을 베풀어 적장을 유인, 6명을 참수하는 개가를 올려서 적의 침공을 좌절시키고 송도를 회복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러한 사실과 관련된 극적루지(克敵樓址)가 안성읍에 있으며, 이 공로로 1362년 지군사로 승격되었고 수주 관할이었던 양량(陽良)·감미(甘彌)·마전(馬田)·신곡(薪谷) 등 네 부곡이 안성군에 소속되었다. 1366년 공민왕의 총신 김용(金鏞)의 수뢰가 탄로나 마전·신곡은 다시 수주로 환속되었다.

1399년(정종 1) 안성군 양양부곡이 분리되어 양지현(陽智縣)이 설치되었다. 안성시는 고려 현종 때 이래 충청도 천안부에 속했는데, 1413년(태종 13) 경기도로 이속되었다. 죽주(竹州)는 이때 죽산현(竹山縣)으로 개칭되어 현감이 배치되었고 1434년(세종 16) 경기도에 소속되었다. 죽산의 별칭으로는 음평(陰平)·연창(延昌) 등이 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홍언수(洪彦秀, 일명 洪自修)와 경기조방장(京畿助防將)으로 전후 5년간 3,000명의 의병을 이끌고 적군의 북상진로를 저지하고자 분전하다가 35세로 순절한 그의 아들 홍계남이 있다.

또 홍계남과 같이 기호·호서 지방의 의병으로 싸우다 전사한 이덕남 등 두 의병장의 전첩비가 지금의 미양면 구수리에 있다. 이때 축성한 서운산성(瑞雲山城)이 경기도와 충청북도의 경계를 이루는 차령산맥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또 임진왜란 중 경기·충청 지방의 군사를 모집하여 천안군과 양성현 일원에 주둔하면서 공수진퇴(攻守進退)의 전술로 왜장 후쿠지마[福島正則]가 거느린 4,500명의 죽산성 주력군을 상대로 황소를 이용한 복개전차대(覆蓋戰車隊) 공격으로 적진을 교란시킨 변이중(邊以中)의 죽산전투는 특기할 만하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도순무사(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 무장(武將) 박찬신(朴贊新), 중군(中軍) 박문수(朴文秀)·조현명(趙顯命) 등이 이끄는 정예 정규군과 이인좌의 무리인 정희량(鄭希亮)·박필현(朴弼顯)·남태징(南泰徵)·박필몽(朴弼夢) 등의 반군이 이곳에서 대진하여 백병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당시의 전승을 기념하는 도순무사 오명항선생토적송공비(吳命恒先生討賊頌功碑)가 낙원동에 있다.

1895년 공주부 안성군·양성군과 충주부 죽산군이 되었다가 1896년 경기도 안성시·양성군·죽산군이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안성군·양성군과 죽산군의 일부가 병합하여 안성군으로 되었으며, 이때 12개 면, 170개 리의 행정구역으로 개편되었다. 1931년 읍내면이 안성면으로 개칭되었고, 1937년 7월 1일 안성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한편, 의병항쟁으로는 독립협회에서 활동하던 시내 임근수(林根洙)·김명기(金明起), 보개면의 강태영(姜泰榮), 공도면의 오인근(吳寅根), 양성면의 오장환(吳章煥) 등이 항일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1919년 3월 28일부터 4월 2일까지 전개된 원곡·양성 지역의 3·1운동은 이유석(李裕奭)·홍창섭(洪昌燮)·이근수(李根洙)·이덕순(李德順)·최은식(崔殷植)·이희룡(李熙龍)의 주도로 2,000여 명의 주민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일경주재소(日警駐在所)·우편소와 같은 식민통치기관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1963년 1월 1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용인군 고삼면이 편입되었고, 1983년 2월 15일 원곡면 용이리·죽백리·청룡리·월곡리와 공도면 소사리가 평택군 평택읍으로 편입되었다. 1987년 1월 1일 보개면 양복리 일부가 금광면으로, 삼죽면 남풍리·동평리·가현리가 보개면으로 편입되었다.

1992년 10월 1일 이죽면이 죽산면으로 개칭되었으며, 1993년 4월 8일 대덕면 건지리 일부와 소현리 일부가 안성읍에 편입되었다. 1998년 4월 1일에 도농통합으로 새로운 안성시가 되었고, 이때 안성읍을 3개 동(안성1·2·3동)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2001년 6월 1일에 공도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유물·유적

죽산면 용설리, 공도면 만정리, 원곡면 칠곡리에서 발굴된 청동기·철기시대 유물이 있다.

성지로는 삼국시대에 축성된 죽산면 매산리의 죽주산성(경기도 기념물, 1973년 지정), 일죽면 금산리의 망이산성(경기도 기념물, 1993년 지정), 양성면 방신리의 무양성(舞陽城)과 조선시대에 축성된 금광면 금광리의 금광산성(金光山城), 비봉산토성, 서운면 북산리의 서운산성(경기도 기념물, 1985년 지정) 등이 있다. 고려시대에 홍건적을 섬멸한 기념으로 지은 극적루가 시내에 있었으나 지금은 자리만 남아 있다.

불교문화재로는 죽산면의 안성 봉업사지 오층석탑(보물, 1966년 지정)·안성 죽산리 삼층석탑(경기도 유형문화재, 1978년 지정)·안성 죽산리 당간지주(경기도 유형문화재, 1979년 지정)·안성 죽산리 석불입상(경기도 유형문화재, 1980년 지정), 매산리 석불입상(경기도 유형문화재, 1973년 지정)이 있다.

또한 칠장리의 칠장사(경기도 문화재자료, 1983년 지정) 경내에 칠장사 오불회괘불탱(국보, 1997년 지정)·칠장사 삼불회괘불탱(보물, 1997년 지정)·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보물, 1968년 지정)·칠장사 대웅전(경기도 유형문화재, 1983년 지정)·칠장사 소조사천왕상(경기도 유형문화재, 1983년 지정)·칠장사 당간(경기도 유형문화재, 1973년 지정)·안성 죽림리 삼층석탑(경기도 유형문화재, 2002년 지정)가 있고, 안성 봉업사지(경기도 기념물, 2003년 지정)에는 안성 봉업사지 석조여래입상(보물, 1989년 지정) 등이 있다.

또한 금광면 상중리의 석남사(石南寺)에는 석남사 대웅전(경기도 유형문화재, 1981년 지정)·안성 석남 사영산전(보물, 1985년 지정)·석남사 마애여래입상(경기도 유형문화재, 1981년 지정)이 있고, 서운면 청룡리의 청룡사(靑龍寺)에는 안성 청룡사 동종(보물, 2000년 지정)·청룡사 영산회괘불탱(보물, 1997년 지정)·청룡사 감로탱(보물, 2000년 지정)·안성 청룡사 금동관음보살좌상(경기도 유형문화재, 2000년 지정)·청룡사 대웅전(보물, 1985년 지정)·청룡사 삼층석탑(경기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청룡사 사적비(경기도 유형문화재, 1985년 지정)가 있다.

그 밖에 삼죽면의 기솔리 석불입상(경기도 유형문화재, 1973년 지정), 대덕면 대농리의 안성 대농리 석불입상(경기도 문화재자료, 1983년 지정), 죽리에 안성 죽리 석조여래입상(경기도 문화재자료, 2002년 지정), 원곡면 성은리의 청원사 칠층석탑(경기도 유형문화재, 1983년 지정)과 안성 청원사 대웅전(경기도 유형문화재, 2000년 지정), 고삼면의 신창리 삼층석탑(경기도 유형문화재, 1986년 지정), 시내의 안성 도기동 삼층석탑(경기도 문화재자료, 1989년 지정) 등이 있다.

이곳은 신라시대부터 불연(佛緣)이 많았던 곳으로 혜소국사·언기대사(彦機大師)·벽응대사(碧應大師) 등이 이곳 출신이다. 현존하는 사찰로는 청룡사·칠장사·청원사·운수암(경기도 문화재자료, 1983년 지정) 등이 있다.

유교문화재로는 명륜동의 안성향교(경기도 문화재자료, 1983년 지정), 죽산면 죽산리에 죽산향교(경기도 문화재자료, 1983년 지정), 양성면 동항리에 양성향교(경기도 문화재자료, 1983년 지정)와 덕봉리의 덕봉서원(경기도 유형문화재, 1972년 지정)을 비롯하여 도기서원지(道基書院址)·남파서원지(南坡書院址)·계고당(稽古堂)·동안강당지(東安講堂址) 등이 있다. 이외 고삼면 월향리에 서흥김씨 삼강정문(경기도 기념물, 1984년 지정)이 있다.

원묘 및 신도비로는 대덕면 토현리의 김중만장군 초상(보물, 1981년 지정)·김중만장군 사패교지(경기도 유형문화재, 1981년 지정), 죽산면 칠장리칠장사의 인목왕후 어필 칠언시(보물, 2010년 지정), 미양면 구수리의 이덕남장군 묘(경기도 기념물, 1975년 지정)·홍계남장군 고루비(경기도 유형문화재, 1977년 지정)가 있다.

또한 낙원동의 오명항선생 토적송공비(경기도 유형문화재, 1978년 지정), 일죽면 고은리의 영창대군 묘(경기도 기념물, 1983년 지정), 삼은리의 안성 유명건 묘갈(경기도 문화재자료, 1983년 지정), 양성면 덕봉리에 안성 정무공 오정방 고택(경기도 유형문화재, 2000년 지정)이 있다.

그리고 기흥읍 상갈리의 경기도립박물관에는 조영복 초상(보물, 1999년 지정)·연행일록 및 연행별장외명현통찰(경기도 유형문화재, 1988년 지정)·서거정선생 묘지석(경기도 유형문화재, 1989년 지정)이 있다.

고건축으로는 낙원동의 안성객사(경기도 유형문화재, 1995년 지정), 보개면 북좌리의 전주이씨 서원군파 묘역(경기도 기념물, 1989년 지정), 서운면 청룡리의 이해룡 고가(경기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 양성면 덕봉리의 안성 오춘환 가옥 등이 있다.

기독교문화재로는 안성 구포동 안성성당(경기도 기념물, 1985년 지정), 양성면 미산리의 미리내성지와 김대건(金大建)신부 묘가 있다.

무형문화재로는 유기장(국가무형문화재, 1983년 지정)의 주물장(鑄物匠) 기능보유자가 이 지역에 있다. 또한 줄타기(국가무형문화재, 1976년 지정), 태평무(국가무형문화재, 1988년 지정), 입사장(경기도 무형문화재, 1997년 지정), 안성 남사당 풍물놀이(경기도 무형문화재, 1997년 지정), 안성 향당무(경기도 무형문화재, 2000년 지정) 등이 있다.

보호수로는 죽산면 칠장리의 칠장사 나옹노송, 구포동의 느티나무, 원곡면 칠곡리의 느티나무와 지문리의 홰나무, 대덕면 삼한리의 은행나무, 미양면 용두리의 엄나무와 안성향교의 은행나무 등이 있다.

한편 3·1만세운동 현장인 원곡∼양성 간의 국도변에는 높이 10.7m의 3·1운동기념탑이 건립되어 애국선열의 자주독립정신을 기리고 있다.

교육·문화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는 안성향교·죽산향교·양성향교 등이 있었다. 안성향교는 1533년(중종 28) 명륜동에 창건되었고, 죽산향교도 같은 해 죽산면 죽산리에 창건되었으며, 양성향교는 17세기 숙종 때에 양성면 동항리에 창건되었다.

1692년(숙종 18)경 봉남동에 홍우원(洪宇遠)을 받들기 위해 그의 후학들이 남파서원을 설립하였으며, 1668년 송시열(宋時烈) 등이 그의 스승인 김장생(金長生)을 추모하여 도기동에 도기서원을 세워 1669년에 사액되었으나 1871년(고종 8)에 철폐되었다. 1695년 양성면 덕봉리에 오두인(吳斗寅)을 배향하기 위해 사림들이 덕봉서원을 설립하여 1697년에 사액되었다. 또한, 홍우원이 수학하였다는 계고당이 대덕면 소현리에 있었으나 1871년 훼철되었고, 유언집(兪彦鏶)을 추모하여 그 문하생들과 유씨문중에서 1786년(정조 10)경 세운 동안강당이 있었다.

근대교육기관으로는 1902년 이종두(李鍾斗)가 사립 안성소학교를 설립하였고, 같은 해 안성초등학교가 개교한 것이 최초이다. 1907년 양성면 미산리에 강도영(姜道永) 신부가 세운 사립 해성학교(海星學校), 1909년 안성천주교회 내에 프랑스 신부 공베르(한국명 孔安國)가 세운 안법학교(安法學校)가 있다.

또한 1910년 양성면 동항리의 적성학교(赤城學校)와 원곡면 산하리에 정응설(鄭應卨)이 설립한 산창학교(山創學校) 등의 사립학교 및 1911년 양성초등학교와 죽산초등학교가 개교하였다.

중등 교육기관으로는 1939년 석정동에 안성농업학교가 개교하였고, 1943년 안성여학교가 설립되었다. 안성농업학교는 1965년 안성농업고등전문학교로 승격되었고, 1970년 초급대학 과정인 2년제 안성농업전문학교로 개편되었다. 1979년 안성농업전문대학으로 1993년 안성산업대학교로 승격되었다. 또, 1978년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가 설립되었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34개교, 중학교 13개교, 고등학교 9개교, 특수학교 1개교와 두원공과대학, 동아방송대학, 한국폴리텍여자대학과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 한경대학교가 있다.

1955년에 개원한 안성문화원은 향토문화발전에 이바지하며, 백성문화제도 개최되고 있다.

민속

이 고장의 중요한 민속놀이로는 남사당(南寺黨)놀이와 거북놀이를 들 수 있다.

원래 남사당놀이는 전국적으로 퍼져 있었지만 그 원조는 역시 안성이었는데, 기록에 의하면 조선 명종 때였다고 한다. 1860년대 서운면 청룡리에는 남사당집이 여덟 채가 있었다 하여 팔사당마을이라 불렸고, 바우덕이(박우덕 또는 김암덕)라는 이가 남사당의 꼭두쇠로서 재질이 총명하고 소고와 춤에도 뛰어나 그에 대한 속요(俗謠)까지 전해지고 있을 정도였다.

안성 남사당패는 그 뒤 안성 복만이패·원육덕패·이원보패로 이어지는데, 이원보패에서 상무동을 서며 쇠가락을 전수받은 김기복(金基福)은 오늘날 안성 남사당풍물놀이에서 상쇠로 전통 웃다리의 쇠가락을 치고 있다.

남사당패는 우두머리인 꼭두쇠, 기획담당자격인 곰뱅이쇠, 각 연희종목의 연희자 중 선임자격인 뜬쇠, 각 뜬쇠 밑에 있는 기능자들인 가열, 초보자인 삐리, 기능을 잃은 노인들인 저승패, 등짐꾼인 나귀쇠 등 40∼50명으로 구성되며, 풍물놀이를 하는 뜬쇠만 해도 꽹과리·징·장구·북·날라리·버꾸 등이 있다.

이들은 다시 상무동님·회덕님(선소리꾼 중 우두머리)·버나쇠(대접돌리기 중 우두머리)·얼른쇠(요술쟁이 중 우두머리)·덜미쇠(꼭두각시놀음 조종자 중 대잡이)·살판쇠(땅재주꾼 중 우두머리)·어름산이(줄꾼 중 우두머리) 등으로 나뉘어 한패거리가 되어서 전국 방방곡곡을 다닌다.

이때 아무 데나 가서 노는 것이 아니라 곰뱅이쇠가 마을에 미리 들어가서 허락을 받고, 터를 빌려주는 곳에서 마당씻이굿을 벌여 구경꾼들을 판으로 끌어들인 다음 한바탕 크게 논다.

남사당놀이는 여섯 마당으로 이루어지는데, 첫째는 ‘마당풍물놀이’라 하여 농악으로 통하는 놀이이고, 둘째는 ‘버나놀이’로 대접을 돌리는 묘기인데 양반을 희롱하는 재담과 소리가 곁들여진다. 셋째는 ‘살판놀이’로 앞곤두·뒷곤두 등 어려운 재주놀이를 벌이며, 넷째는 ‘어름놀이’라 불리는 줄타기놀이로 재담과 소리를 곁들인다.

다섯째는 ‘덧뵈기놀이’인 탈놀음인데 마당씻이·옴탈잡이·샌님잡이·먹중잡이의 네 편으로 되어 있고, 여섯째는 끝마당으로 ‘덜미놀이’라는 꼭두각시놀이인데 이것도 박첨지마당·평안감사마당 등 일곱 거리로 되어 있다.

유래가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제로는 일죽면 고은리마옥산(磨玉山, 일명 五音山)의 산신제와 방초리의 천제를 들 수 있다.

마옥산의 산신제는 매년 음력 10월 초순에 날을 받아 저녁 5시쯤 행해진다. 산 밑 송림이 무성한 곳에 산신당이 있어 이곳에 소머리를 놓고 제를 지내는데, 제물과 절차가 엄격한 관례로 규제된다.

제관은 목욕재계한 다음 사흘간 외부출입을 삼가고 근신하며, 젯날이 결정되면 어느 누구도 동네의 출입이 금지된다. 제관의 축원은 풍년과 태평성세를 비롯하여 가축의 역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나라에 대한 제사인 국소제(國所祭)를 먼저 지낸 다음 산신제를 지내는 것이 특이하다.

산신제를 지내는 동안 동민들도 각각 떡을 쪄서 일제히 집에서 고사를 지내고, 산신제가 끝나면 마을은 축제분위기가 되어 잔치가 벌어진다. 이곳의 산신제는 한 번도 중단된 일이 없다고 한다. 계동·도기동과 삼죽면 기솔리에서도 이와 동일한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설화·민요

이 시에는 「오뉘힘내기전설」·「달래지고개전설」 및 사찰유래담·지명유래담과 많은 인물전설·효자전설 등이 전하고 있다.

칠장사 안에는 동강난 비석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 왜장 가토[加藤淸正]가 이 절에 난입하여 만행을 저지를 때 홀연 한 노승이 나타나 꾸짖으니, 노한 가토가 칼로 내려치자 노승은 간 곳이 없고 동강난 비석만 서 있었다고 한다.

죽주산성에도 「오뉘힘내기전설」이 전해지는데, 그 내용은 굽 높은 나막신을 신은 오라비가 서울에 다녀오는 동안 누이는 성을 쌓는다는 것으로, 그 승부 여하에 따라 서로의 목숨이 걸려 있는 비장한 결말을 가지고 있는 이야기이다.

‘안성 도기동 사람들은 트집쟁이’라는 말이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 말은 갓의 명산지였던 이 마을사람들이 갓을 제작하는 도중에 틀어진 갓을 바로잡을 때 ‘트집잡는다.’라고 말한 것이 와전된 것이라고 한다.

「달래지고개전설」은 비오는 날 이 고개를 넘어가던 오라비와 누이가 근친상간을 피하기 위해 오라비가 자살하고 만다는 이야기이다.

「아차지고개전설」은 충주의 구두쇠 자린고비가 장독에 빠졌던 파리의 다리에 묻은 장이 아까워서 그 파리를 쫓아오다가 이 고개에서 놓치고, “아차, 이젠 놓쳤구나!”하였다는 데에서 유래한 지명담이다.

개심사(改心寺)의 유래담은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부처의 가슴에 칼을 꽂은 중이 뒤에 회개하고 불상에서 칼을 빼내자, 칼에 ‘改心’이라는 글이 박혀 있어 절이름을 개심사라 했다는 전설이다.

그 밖에 조선 충신으로 중국에 들어가서 명나라를 일으켰다는 주원장(朱元璋)에 관한 설화, 명의 이제마(李濟馬)의 출생담, 정약용(丁若鏞)의 명재판, 황희(黃喜)정승이야기, 「개와 고양이의 구슬다툼」, 「다시 찾은 옥새」 등 많은 설화가 전한다.

이 시에 구비 전승되는 노동요로는 「논매기소리」·「모내기소리」·「나무꾼소리」등이 있고, 의식요로는 「상여소리」·「달구소리」, 그리고 정월이나 팔월 추석에 거북놀이를 할 때 복덕을 빌기 위해 부르는 「고사반」 등이 있다.

그 밖에 타령류로서 「장타령」·「창부타령」·「노랫가락」·「방구타령」, 그리고 “칙칙폭폭 칙칙폭폭/한강다리를 건너간다”라는 「기차타령」 등이 있다.

“여기두 어허하나/저기두 또하나”라는 「하나하나」는 경기도지방의 공통된 모내기소리로 가락이나 가사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논매기소리」를 소개하면 “어하어기럴럴 상사디야/여기하고서 어느데냐/어하얼럴럴 대허리야/일락은 서산에 해는 뚝떨어지고/월출동녘에 저기 저 달이 뜬다/어하어기럴럴 대허리야…….”와 같다. 가락이 단조로우나 길게 올려 뻗으며 구성지고 후렴은 힘찬 것이 특징이다.

다음과 같은 「방아타령」은 초벌김매기(이른바 ‘아시맨다’라고 함.)할 때 주로 부르고, 가끔 디딜방아를 찧을 때에도 부른다. 그 가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방아가 누구 방아냐/유씨네 가중에 방아로구나/에이여라 방호/동네방네 연재방아/에이여라 방호/동네방네 디딜방아/에이여라 방호/젱이읍내는 물레방아/에이여라 방호…….”

또한 지게목발을 두드리면서 부르는 「나무꾼소리」는 나무꾼의 외로운 마음을 외로운 나무에 비유하여 청춘의 늙어감을 탄식하는 내용으로, 애상적인 가창민요이다. 이 고장에는 ‘밭노래’는 거의 없는데, 이는 이 고장이 논농사 중심이기 때문이다.

「상여소리」는 대체로 인생의 허무와 권선징악적인 인과응보를 읊고 있다. 「창부타령」은 임을 그리워하는 연정을 제재로 하여 청춘시절에 실컷 놀자는 내용으로, 가락은 장단과 고저가 다양하며 흥겨운 유흥민요이다.

산업·교통

전 토지의 48%가 산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경지는 29.5%인데, 경지 중 논이 1만 1312㏊, 밭은 5,054㏊, 과수원은 242㏊ 등이다. 고삼(古三)저수지·금광(金光)저수지·마둔(馬屯)저수지·칠곡(七谷)저수지 등이 주변의 농경지에 관개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 이외에 옥수수·콩·팥·녹두·감자·고구마와, 채소류로 고추·무·배추·파·마늘·당근, 특용작물로는 참깨·들깨 등이 생산되고 있다. 산지가 많은 이 지역에는 밤·도토리·은행·대추 이외에 표고버섯이 생산되고 있다.

경부고속도로와 중부고속도로 등이 이 지역을 지나고 있는데 고속도로변에는 목축업·과수업이 발달하고 있다. 특히, 포도가 많이 생산된다. 과실류로 포도·배·사과·복숭아가 생산되고 있다.

농업인구는 전체 인구의 22%이고 제조업 인구는 전 인구의 13.7%이다. 주요 제조업은 식료품제조업·화학 공업·비금속공업·조립금속공업이다. 특히 유기제조업이 이 지역의 특산물이다.

상업시설은 일반시장이 3개가 있는데 읍내에 있는 유기시장이 잘 알려져 있으며 상설시장의 개설에도 불구하고 안성장(5일장)이 열리고 있다. 안성은 충청도·전라도·경상도를 잇는 교통의 요지로 농산물의 집산지로 안성장은 2·7일에 열리는데 안성장은 전국을 상대로 하는 장이다.

이곳에서는 곡류·유기제품·제지류·포도를 비롯한 청과류·채소류가 판매되고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 열리는 우시장은 과거에는 옛날에는 활기를 띠었으나 쇠퇴하고 있다. 안성장 이외에 죽산면의 죽산장이 3·8일, 일죽면의 일죽장이 5·10일에 열리고 있다.

도로는 경부고속도로가 서부지역을 남북으로, 중부고속도로가 동쪽을 남북으로 지나고 있다. 2008년 말 평택∼음성 간 고속도로가 개통되어 경부고속도로의 교통량을 분산시켜주고 있다.

국도 38호선이 동서로 지나고 국도 45호선이 서북부의 원곡면·양성면을 서남∼북동 방향으로 지나고 국도 17호선이 동북쪽에서 중부고속도로와 나란히 지나고 있다.

지방도로로 339호선·392호선·387호선 등이 안성시내를 중심으로 방사선으로 지나고 있어 교통로가 잘 발달한 지역이다. 철도는 안성∼천안의 안성선이 있었으나 1989년 폐선되어 교통은 도로에만 의존하고 있다.

관광

차령산맥의 지세를 받아 산지와 분지가 발달하고 안성평야 지대에서는 예로부터 농업이 발달한 지역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이곳은 동북부에 마옥산·마이산·무마산·서운산 등이 연봉을 이루면서 산간 계곡이 수려하고 안성천 유역에 주거지가 발달하면서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많은 전설과 사찰이 곳곳에 분포되어 있고 관광위락시설과 농어촌 위락단지도 조성되고 있어 주요한 관광지가 되고 있다.

충청북도에서 서울로 왕래하던 길목에 죽주산성이 자리잡고 있는 안성은 교통의 요지이며 군사요충지로 유명한 곳이다. 또한, 팔도의 물건들이 모여들고 각종 농산물과 생활수공품들이 집결되었던 문화의 접경지대로 유명했었다.

‘안성맞춤’이라고 할 정도로 안성에 가면 무엇이든 구할 수 있다는 상설시장 기능도 한때 가지고 있던 고장이다. ‘안성맞춤’이란 안성 유기그릇과 가죽꽃신이 유명하여 생겨난 말이다.

이와 같이 사통팔달하는 육로를 따라 삼남과 한양으로 통하는 이곳의 안성시장 5일장은 조선 3대 시장으로 손꼽히는 유명한 상업중심지이기도 하였다.

관광명소로서는 미륵동네와 사찰들이 많고, 서운산 계곡을 비롯한 저수지와 관광과수단지·산성·향교 등이 있다. 특히 안성 땅에는 언제나 소박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있어 왔던 미륵부처들이 유난히 많은 것이 특징이다. 태평 미륵, 기솔리 미륵, 아양동 미륵, 대농리 미륵이 그 대표적이다.

모든 백성들은 그들이 원하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소망을 갖고 마을 어귀나 마을 중심가에 미륵불을 세우고 미륵불의 넉넉한 미소로 그들의 생활에 위안을 삼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서운산 계곡·칠장사·혜소국사비·죽산리의 당간지주·칠장사 당간지주·봉업사지 오층석탑·석남사·안성향교·죽주산성·안성유기 관광토산물·과수단지·고삼저수지·대림동산 수영장·금광저수지·현충탑·안성컨트리클럽·안성공원·고삼농어촌유양단지 등은 이 지역 관광지로 유명하다.

그 중에서도 일곱 도적이 개과천선해 성인이 되었다는 칠장사와, 남사당의 잔영이 남아 있는 청룡사와 불당골, 서운산 깊숙이 숨어 있는 석남사 등은 그 장쾌함에 가슴 벅차는 곳이다.

또한 우리의 오랜 역사 속에서 민중들이 스스로 형성, 발전시킨 유랑예술인 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남사당패’는 안성의 뿌리 깊은 사회적 관광자원이라 할 수 있다. 안성을 무대로 한 유명한 소설 중 허생전·장길산·임꺽정 등의 무대가 이곳 안성 땅이었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읍·면
  1. 공도읍(孔道邑)

시의 서단에 위치한 읍. 면적 31.94㎢, 인구 5만 7245명(2015년 현재). 읍 소재지는 승두리이다. 본래 양성군(陽城郡)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양성군 공제면(孔梯面)·도일면(道一面)·덕산면(德山面)·구룡동면(九龍洞面)·구천리면(九千里面)·영통면(令通面) 등의 각 일부 지역이 합쳐져 12개 리로 재편되면서 공도면이 되었다.

면 명칭은 공제면의 ‘공’자와 도일면의 ‘도’자를 딴 데서 유래하였다. 1983년 소사리(素沙里)가 평택군 평택읍으로 이속되어 현재의 11개 리가 확정되었다. 2001년 6월 1일 읍으로 승격되었다.

읍 전체가 별다른 산지를 찾을 수 없는 평지로서, 읍의 중앙을 흐르는 승두천·유천 유역에 충적평야가 크게 발달해 있으며 일부지역에 침식평야도 분포한다. 전체면적에 대비한 경지율이 매우 높고, 논농사를 주로 행하는 대표적인 지역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콩·팥 등이며, 채소류로는 수박·참외·오이·호박 등의 산출량이 많다. 또한, 목축업도 발달하여 한우·젖소·닭·산양·오리 등의 사육이 활발하다. 전자·식품 등의 제조업체 수도 적지 않으며 숙박 및 음식점 업체수도 다수 산재한다.

교통은 경부고속도로가 읍의 중앙을 종단하는 가운데 안성인터체인지가 위치하여 남과 북을 연결하는 교통 흐름상의 요지 역할을 맡는다. 그 밖에 38번 국도가 평택시에서 이어져 읍의 중앙을 횡단하면서, 364번 지방도 및 3번 시도와 연결되는 등 많은 도로망이 정비되어 있다.

문화유적은 만정리 신기마을에 고인돌유적이 있다. 관광자원으로 만정리에 위치한 만수저수지와 마정리의 대림동산이 휴양시설로 알려져 있다. 특히 1971년 전원주택단지를 목적으로 조성된 대림(大林)동산은 33만 평 규모의 구릉지대에 중앙공원과 각종 체육시설들이 들어서 인근 도시민들의 휴식처이자 시의 대표적인 관광시설로 각광받는다.

승두(蠅頭)·불당(佛堂)·웅교(熊橋)·신두(薪頭)·용두(龍頭)·양기(兩基)·마정(馬井)·만정(萬井)·건천(乾川)·중보(中洑)·진사(珍沙) 등 11개 리가 있다.

  1. 고삼면(古三面)

시의 중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27.78㎢, 인구 2,073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가류리이다.

본래 양지군(陽智郡)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양지군 고동면(古東面)·고서면(古西面)·고북면(古北面) 등 3개 면과 죽산군(竹山郡) 서삼면(西三面) 풍정리(楓井里) 일부 지역이 합쳐져 7개 리로 재편되면서 용인군(龍仁郡) 고삼면이라 하였다.

면의 명칭은 고동·고서·고북 등 3개 면의 앞글자인 ‘고’자를 따고 3개 면을 통합했다는 의미에서 ‘삼’자를 붙였다고 한다. 그 뒤 1963년용인군에서 안성군으로 관할구역이 바뀌었다.

중앙 북쪽에 쌍령산(雙嶺山, 491m), 북동쪽에 경수산(鏡水山, 326m), 중앙부에 금병산(金屛山, 235m) 등이 솟아 있다. 남단의 한천(漢川)과 북동부의 쌍지천 유역에 충적평야가 일부 분포한다. 대부분의 지역이 낮은 구릉성 산지이며 논과 밭의 경지면적은 시 전체에서 하위에 속한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 등이며, 임산물로는 산나물·밤·대추·잣 등이 나는데 특히 산나물 산출량은 매우 많다. 축산업으로는 돼지사육이 시 전체에서 제일 활발한 곳이며, 이에 반해 제조업 발달은 미미하다.

교통은 392번 지방도가 면의 남쪽에서 중앙을 지나 북동쪽으로 향하면서 북단으로 이어지는 11번 시도와 만난다. 문화유적은 신창리에 삼층석탑, 월향리에 서흥김씨 삼강정문·한동수 효자비(韓東秀 孝子碑)·유양식 묘(柳陽植 墓)와 삼은리에 안성 유명건 묘갈 등이 있다.

가류(佳柳)·쌍지(雙芝)·삼은(三隱)·신창(新倉)·봉산(鳳山)·대갈(大葛)·월향(月香) 등 7개 리가 있다.

  1. 금광면(金光面)

시의 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71.71㎢, 인구 8,612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내우리이다.

본래 안성군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조령면(鳥嶺面)·대문면(大門面)·가동면(加洞面)·월동면(月洞面) 등 4개 면이 통합되어 15개 리로 개편되면서 금광면이라 하였다. 1987년보개면의 양복리 일부가 편입되어 신양복리가 신설되었다.

면 중앙 북쪽에 청량산(淸凉山, 340m)이 솟아 있고 북동쪽은 칠장산(七長山, 492m)·칠현산(七賢山, 516m)·덕성산(德城山, 520m) 등 비교적 고봉들이 면 전체를 굽어보는 형세이며, 중앙 하단의 국사봉(國師峰, 311m)을 제외하고는 서부쪽으로는 낮은 지역이다.

면의 중앙을 흐르는 한운천(閑雲川)·현곡천(玄谷川)·옥정천(玉井川) 등이 금광저수지와 마둔저수지로 흘러들고, 월동천(月洞川)과 현암천(峴巖川)이 안성천에 합류하면서 주변 유역에 충적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시 전체에서 제일 넓은 면적이나 상대적으로 논과 밭 등의 경지면적이 넓지 않고 경지율 또한 높지 않다. 논농사가 밭농사보다 다소 우세하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팥 등의 농산물 외에 버섯·산나물 등인데, 임산물 중에서 특히 버섯의 생산량은 시 전체에서 제일 많다. 제조업 분야는 아직 활발한 편이 못 된다.

교통은 313번 지방도가 면 서부지역을 종단하고 387번 지방도가 면의 남서쪽에서 북동쪽으로 종단하면서 시의 중심지인 시청 방향으로 향한다. 이 외에 북쪽의 도로망으로 5번 시도가 있다.

문화유적은 상중리에 석남사 대웅전·석남사 마애여래입상·석남사 영산전·석남사 오층석탑·석남사 부도 등이 있다. 이 밖에도 오흥리에 마둔사(馬屯祠)·삼한국대부인 순흥안씨 묘, 금광리에 금광산성, 오산리에 선돌 등이 있다.

금광(金光)·오흥(五興)·사흥(四興)·삼흥(三興)·옥정(玉井)·현곡(玄谷)·한운(閑云)·오산(梧山)·장죽(長竹)·석하(石下)·상중(上中)·내우(內隅)·개산(開山)·신양복(新陽福) 등 14개 리가 있다.

  1. 대덕면(大德面)

시의 중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31.16㎢, 인구 1만 982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건지리이다. 본래 안성군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안성군 죽촌면(竹村面)·소촌면(所村面)·견내면(見乃面)·금곡면(金谷面) 등 4개 면과 양지군(陽智郡)의 고서면(古西面)과 양성군(陽城郡) 송오리면(松五里面) 각 일부가 통합되어 14개 리로 구성되었고 안성군 대덕면으로 개칭되었다.

면 전체에 완만한 침식구릉지가 펼쳐져 있다. 서쪽과 북쪽 면계의 한천 유역과 남쪽 경계인 안성천 유역에 충적평야가 넓게 분포한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 등이며, 배·포도 등의 과실류와 함께 수박·토마토 등의 생산량도 많은 편이다. 축산업으로는 닭을 비롯하여 돼지·사슴 등이 사육된다.

제조업은 건지리 일대에 20만 평 규모의 안성시범공단 안에 무공해 업종을 중심으로 수십 개의 업체가 들어서 있다. 특히 대규모 제조업체가 많은 관계로 시 전체에서 제일 많은 제조업 종사자가 일하고 있다. 이 외에 숙박 및 음식점업도 활발한 편이다.

교통은 38번 국도가 면 남단을 횡단하고, 387번 지방도가 남서쪽에서 북동쪽을 연결하며 392번 지방도가 면의 북동단을 종단한다. 이 외에 10·14번 시도 등의 도로망이 있다.

문화유적은 토현리에 김중만장군 초상과 김중만장군 공신록 및 교지, 대농리에 석불입상, 진현리굴암사에 굴암사 마애여래좌상·굴암사 마애선각불좌상, 명당리에 고분 등이 있다. 소현리 소천(蘇村: 일명 소마니)마을 뒷산은 백로와 왜가리의 서식지로 알려졌다.

건지(乾芝)·죽(竹)·내(內)·신령(新令)·모산(茅山)·보동(湺東)·소현(蘇峴)·토현(兎峴)·대농(大農)·진현(辰峴)·삼한(三閑)·무릉(舞陵)·명당(明堂)·소내(素內) 등 14개 리가 있다.

  1. 미양면(薇陽面)

시의 남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33.72㎢, 인구 7,430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양지리이다.

본래 안성군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안성군 목촌면(木村面)·만곡면(晩谷面)·진두면(辰頭面)·우곡면(于谷面) 등 4개 면과 죽촌면(竹村面) 외평(外坪) 일부가 합쳐져 18개 리로 구성되면서 미양면으로 개칭되었다.

남서쪽의 미양산(93m), 남동쪽 경계의 진령봉(125m) 등의 낮은 산지가 있지만 대부분의 지역이 평탄한 지형이다. 북단 경계인 안성천을 필두로 면 곳곳을 관류하는 청룡천(靑龍川)·신릉천(新陵川)·양변천(兩邊川) 유역에 넓은 충적평야가 펼쳐져 있고, 밭농사보다 논농사가 훨씬 우세한 지역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이며, 사과·배·복숭아 등의 재배가 활발하다. 채소류로 수박·오이·토마토 산출이 상당량에 달하고, 한우·젖소·돼지·산양·개 사육과 함께 양봉도 활발하다. 제조업은 계륵리에 안성제2공업단지가 조성되어 식품·화학·섬유·자동차부품업 등이 발달하였다.

교통은 경부고속도로가 면 서쪽 끝 신계리를 통과하며, 392번 지방도가 남서쪽에서 면의 북단을 통과하여 북동쪽으로 횡단한다. 이 외에 1·3·8번 시도가 면의 여러 곳을 연결하면서 392번 지방도와 만난다.

문화유적은 구수리에 홍계남장군 고루비(洪季男將軍 古壘碑)·이덕남장군 묘(李德男將軍 墓), 갈전리에 홍자수 묘(洪自修 墓), 용두리에는 약 250년 된 엄나무가 있다. 법전리에 용화사(龍華寺)가 있다.

양지(陽支)·후평(後坪)·정동(井洞)·마산(馬山)·진촌(眞村)·신계(新溪)·개정(開井)·법전(法田)·고지(古地)·강덕(康德)·양변(兩邊)·구수(九水)·계륵(桂勒)·보체(保體)·구례(九禮)·갈전(葛田)·용두(龍頭)·신기(新基) 등 18개 리가 있다.

  1. 보개면(寶蓋面)

시의 중앙에 위치한 면. 면적 53.00㎢, 인구 6,083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불현리이다.

본래 안성군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북좌면(北佐面)·가사면(加士面)·거곡면(居谷面)·율동면(栗洞面)·기좌면(其佐面) 등 5개 면의 30여 개 리가 통합되어 18개 리로 개편되면서, 보개면이 되었다.

1987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양복리의 일부 마을이 금광면으로 이관되었고, 삼죽면의 남풍·동평·가현 등 3개 리가 편입되어 현재의 행정구역을 갖추었다.

면의 북쪽에 달기봉(415m), 동쪽에 국사봉(國師峰, 438m)·보개산(347m), 남서쪽에 청량산, 서쪽에 비봉산(飛鳳山, 278m), 중앙에 돌섯산(179m) 등의 산지가 면 전체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남단을 흐르는 안성천을 비롯하여 남풍천·가율천·오두천 등 하천유역에 충적층이 발달하였다. 특히, 신장(新長)·신안(薪安)·북좌(北佐)·남풍(南楓) 등의 저수지가 면 곳곳에 위치하여 관개용수가 풍부한 편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임산물 재배가 활발한데 밤·호도·대추·잣·버섯·산나물 등이 대표적이다. 축산업은 한우·젖소·돼지·사슴·오리 등의 사육량이 적지 않고, 이 외에 양봉이 제일 활발한 곳이다. 제조업은 금속·레미콘·섬유업 관련 업체가 있으나 대부분 영세한 규모이다.

교통은 38번 국도가 면 남단을 횡단하고 339번 지방도가 면 서부를 남북으로 종단한다. 그 밖에 5·12번 시도의 도로망이 정비되어 있다. 문화유적은 북좌리에 전주이씨 서원군파 묘역(全州李氏 瑞原君派 墓域)이 있다.

불현(佛峴)·북좌(北佐)·오두(烏頭)·신안(薪安)·보평(洑坪)·구사(九士)·내방(內芳)·동신(東新)·양복(陽福)·상삼(上三)·기좌(其佐)·곡천(曲川)·이전(泥田)·가율(加栗)·적가(迪加)·신장(新長)·남풍(南楓)·동평(東平)·북가현(北加峴) 등 19개 리가 있다.

  1. 삼죽면(三竹面)

시의 동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39.06㎢, 인구 3,621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용월리이다.

본래 죽산군(竹山郡)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죽산군 서일면(西一面)·서이면(西二面)·서삼면(西三面) 등 3개 면이 통합되어 13개 리의 행정구역을 관할하였고 죽삼면(竹三面)이라 불리다가 삼죽면으로 면 명칭이 바뀌었다.

1987년 1월에 남풍(南楓)·동평(東平)·가현(加峴) 등 3개 리가 보개면으로 이속되어 관할구역이 10개 리로 줄어들었다.

산지로는 북서부에 비봉산(飛峰山, 373m), 동쪽에 도덕산(道德山, 366m), 남동쪽 끝에 칠장산, 서쪽 보개면과 인접하여 국사봉·보개산 등이 솟아 있다. 하천으로는 남단에서 중앙쪽으로 흐르는 안성천, 서부의 기솔천, 북단을 관류하는 율곡천 유역에 충적층이 형성되었고, 덕산(德山)·회암(回巖)·미장(美獐) 저수지가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고추 등과 인삼의 특용작물이 있고, 버섯·잣·도토리·은행 등의 임산물 재배도 활발하다. 이 외에 한우·돼지의 사육량도 상당하며, 특히 양봉도 발달하였다. 제조업은 덕산리에 덕산산업단지가 형성되어 새로운 공업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교통은 38번 국도가 면 남서쪽에서 중앙을 관통하여 북동쪽으로 횡단하며 5·12·17번 시도 등 지방 도로망이 확충되었다. 문화유적은 기솔리에 석불입상이 있다.

용월(龍月)·진촌(眞村)·율곡(栗谷)·덕산(德山)·내장(內長)·배태(排台)·내강(內康)·미장(美獐)·마전(麻田)·기솔(基率) 등 10개 리가 있다.

  1. 서운면(瑞雲面)

시의 남단에 위치한 면. 면적 36.27㎢, 인구 3,853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인리이다.

본래 안성군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덕곡면(德谷面)·기촌면(奇村面)·입장면(立長面)·송죽면(松竹面) 등 4개 면 지역이 합쳐져 15개 리로 개편되면서 서운면이라 개칭되었다.

면의 동쪽에 서운산(瑞雲山, 547m) 자락이 중앙으로 뻗어 있고, 북부에서 남부에 걸쳐 계촌천·구수천·양촌천·초성천·북산천 등이 차례로 면 전체를 관류하면서 주변 일대에 넓은 평야지대를 조성해 놓았다. 양촌(陽村)·청룡(靑龍)·중동(中洞) 등의 저수지를 끼고 있는 미작지대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팥 등이며, 채소류로 참외·오이·호박과 함께 과실류로 사과·배·포도의 산출이 많다. 버섯·산나물도 많이 나며, 약초·산수유 등의 약용재배가 두드러진다. 제조업은 화학과 요업 관련업체가 있다.

교통은 339번 지방도가 남단에서 중앙을 지나 북쪽 지역으로 종단하면서, 서쪽의 6번 시도와 동쪽의 7번 시도와 이어진다. 문화유적은 청룡리의 청룡사 경내에 청룡사 대웅전·청룡사 영산회괘불탱·청룡사 동종과 부도군·청룡사 사적비·청룡사 삼층석탑·이해룡 고가, 북산리에 서운산성(瑞雲山城)·심기조 효자문(沈基祖 孝子門) 등이 있다.

인(仁)·신기(新基)·신릉(新陵)·오촌(梧村)·송산(松山)·현매(賢梅)·송정(松井)·양촌(陽村)·동촌(洞村)·신촌(新村)·신흥(新興)·북산(北山)·산평(山坪)·청룡(靑龍) 등 14개 리가 있다.

  1. 양성면(陽城面)

시의 북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53.16㎢, 인구 5,553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동항리이다.

본래 양성군 지역으로 고구려 당시에는 사복홀(沙伏忽), 신라 때는 적성(赤城)으로 고쳐 불렸고, 다시 고려 초기에 양성(陽城)으로 개칭된 뒤 1018년(현종 9) 수주(水州: 현 수원)에 이속되었다가 1413년(태종 13)충청도에서 경기도로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양성군 읍내면(邑內面)·지동면(紙洞面)·송오리면(松五里面)·금곡면(金谷面)·덕산면(德山面) 등 5개 면과 양지군(陽智郡) 고북면(古北面)과 안성군 금곡면(金谷面) 각각 일부 지역이 합쳐져 18개 리로 행정구역이 재편되면서 안성군 양성면이라 개칭되었다.

산지는 서고동저(西高東低)의 형태를 이루는데 북중앙에 묘봉(卯峰, 229m), 서쪽에 신선봉(神仙峰, 303m), 남서쪽에 고성산(高城山, 298m), 북동쪽에 쌍령산 등 주로 300m 내외의 준봉들이다. 북동쪽 경계를 흐르는 한천(漢川) 이 외에 면 곳곳에 동항천·교동천·진위천·옥정천 등이 관류하면서 넓은 충적평야를 만들었다. 이들 하천유역에 미산·이현·산정·동항 등의 저수지가 산재한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팥·녹두 등이다. 수박·참외·오이·토마토 등의 채소류, 밤·호도 등의 임산물도 많이 생산된다. 축산업으로는 한우사육이 제일 활발하고 이 외에 사슴·토끼 등의 가축과 양봉도 행해진다. 제조업은 제약·섬유·석재업 관련업체가 있다.

교통은 45번 국도가 동쪽에서 북쪽 중앙으로 종단하며 364번 지방도가 남쪽 지역을 가로지른다. 이 외에 4번 시도가 동서를 연결하는 등 도로망이 정비되어 있는 편이다.

문화유적은 덕봉리에 덕봉서원과 안성 오춘환 가옥(安城 吳春煥 家屋), 방신리에 운수암, 동항리에 양성향교 등이 있다. 이 밖에 도곡리에는 느티나무가 있다. 특히, 미산리 소재 미리내성지는 25만 평 규모로 당시 천주교 박해 때 많은 신자들이 숨어 살았던 곳으로, 성지 안에 김대건신부의 묘가 있다.

동항(東恒)·구장(舊場)·석화(石花)·추곡(楸谷)·조일(照日)·도곡(桃谷)·산정(山井)·이현(梨峴)·장서(長西)·난실(蘭室)·노곡(老谷)·미산(美山)·방축(防築)·필산(筆山)·덕봉(德峯)·명목(名木)·삼암(三巖)·방신(芳新) 등 18개 리가 있다.

  1. 원곡면(元谷面)

시의 서북단에 위치한 면. 면적 37.83㎢, 인구 5,077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외가천리이다.

본래 양성군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양성군 원당면(元堂面)·반곡면(盤谷面)·승양원면(升陽院面)·도일면(道一面)·구룡동면(九龍洞面) 지역과 진위군(振威郡) 여방면(余方面)·마산면(馬山面)의 각 일부가 합쳐져 12개 리로 재편되면서 안성군 원곡면이 되었다.

면의 명칭은 원당면 ‘원’과 반곡면의 ‘곡’을 따서 유래되었다고 전한다. 1983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용이(龍耳)·죽백(竹柏)·청룡(靑龍)·월곡(月谷) 등 4개 리가 평택군 평택읍에 이속되었다.

면의 북동쪽에 신선암·천덕산, 동쪽에 고성산, 서쪽에 덕암산(德巖山, 165m)·팔용산(八龍山, 122m), 남서쪽에 백운산(白雲山, 191m) 등 면 전체를 에워싸고 있으나 대부분 낮은 구릉지에 가깝다.

북부의 성은천과 중앙의 통복천(通伏川)이 관류하면서 주변 일대에 넓은 충적평야를 만들었다. 따라서 논농사가 활발히 이루어지는데, 상지·칠곡·반제·독정저수지 등 농업 관개용수에 힘입은 바 크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 등이며, 담배의 수확량이 특히 많고 호도·잣·산나물 등의 임산물 생산량도 적지 않다. 배·포도를 중심으로 한 과수농업도 크게 발달해 있으며, 한우·돼지·사슴·오리 등의 목축업도 성한데 특히 오리 사육두수는 시 전체에서 절대적이다. 제조업으로는 콘크리트 기계 분야의 중소업체들이 있다.

교통은 경부고속도로가 면의 중앙을 시원스럽게 종단하고 있으며, 45번 국도가 남서쪽에서 동쪽으로 횡단하면서 용인시와 연결된다. 340번 지방도가 남서쪽의 교통편의를 도모하고 북쪽에는 387번 지방도가 있다. 이 밖에 면의 중앙에 2번 시도가 국도와 지방도를 연결한다.

문화유적은 성은리에 청원사 칠층석탑, 지문리에 최규서 어서각(崔奎瑞 御書閣)·최만리 묘(崔萬理 墓), 성은리에 이양섭 생가(李陽燮 生家) 등이 있다. 그 밖에 칠곡리에는 수령 550년 된 높이 30m의 느티나무가 있으며, 지문리에는 수령 300년 된 높이 20m의 회화나무가 있다. 그리고 칠곡리에는 3·1운동기념탑이 있다.

외가천(外加川)·지문(芝文)·칠곡(七谷)·성은(聖恩)·성주(聖住)·내가천(內加川)·반제(盤諸)·산하(山下) 등 8개 리가 있다.

  1. 일죽면(一竹面)

시의 동북단에 위치한 면. 면적 55.54㎢, 인구 8,228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송천리이다.

본래 죽산군(竹山郡)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죽산군의 남일면(南一面)·남이면(南二面)·북일면(北一面)·북이면(北二面) 전체, 죽산군 제촌면과 음죽군(陰竹郡)의 각 일부 리·동이 합쳐져 15개 리로 재편되면서 죽일면(竹一面)으로 개칭되었다. 이듬해인 1915년에 면 명칭이 일죽면으로 다시 변경되었다.

북쪽에 마옥산(磨玉山, 441m), 서쪽에 묘령산(妙龍山, 174m), 남쪽에 마이산(馬耳山, 472m)·황색골산(353m) 등이 솟아 있다.

중앙부를 횡류하는 청미천(淸渼川)과 서쪽 면계의 죽산천을 중심으로 북쪽에 방초천(芳草川)·화곡천(和谷川)·신흥천(新興川), 남쪽에 화봉천(花鳳川) 등이 있는데 이 유역에는 충적평야가 크게 발달하였다. 논과 밭의 경지면적이 시 전체에서 제일 넓은 대표적인 농업중심 지역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콩·팥·녹두·깨 등이며, 포도의 산출량이 특히 많다. 수박·참외·오이·호박·토마토 등의 채소류 전부도 그 생산량이 시 전체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점한다. 축산업으로 한우·젖소·닭 등과 칠면조·거위 등도 사육된다.

제조업은 근래 들어 금산산업단지의 조성으로 그 분야를 넓혀가고 있다. 특히 이 단지내에 최신식 축산물 종합처리장의 완공으로 수도권 전역에 대한 육류공급기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한다.

교통은 중부고속도로가 면의 서부를 남북으로 종단하며, 일죽인터체인지를 통해 진출입이 가능하다. 공도면부터 이어지는 38번 국도가 면 중앙을 횡단하고, 북쪽에는 341번 지방도가, 남쪽에는 318·331번 지방도가 있다. 이 밖에 남서쪽에서 동부를 연결하는 16번 시도 등 도로망이 정비되어 있는 편이다. 금산리 장성거리는 오래 전부터 삼남 지방과 직결되는 교통의 요지였고, 장암리의 마방거리는 말이 쉬어가던 장소였다.

문화유적은 고은리에 영창대군 묘(永昌大君 墓)와 금산리에 망이산성이 있다. 그 밖에 신흥리에 선유동 마애불사존상과 세종 때의 문신인 최용소(崔龍蘇)의 묘, 가리에 정조 때의 문신인 홍명호(洪明浩)의 묘 등이 있다.

송천(松川)·당촌(唐村)·능국(菱菊)·신흥(新興)·화곡(和谷)·고은(古銀)·주천(注川)·가(佳)·금산(金山)·산북(山北)·죽림(竹林)·장암(長巖)·월정(月井)·화봉(花鳳)·방초(芳草) 등 15개 리가 있다.

  1. 죽산면(竹山面)

군의 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57.26㎢, 인구 7,448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죽산리이다.

본래 죽산군 지역으로 고구려 때는 개차산군(皆次山郡)이라 하다가 신라 때는 개산(介山)으로 개명되었고, 고려 초기에 죽주(竹州)라 불리다가 1413년(태종 13)에 지금의 명칭인 죽산(竹山)이라 하였다. 세종 16년에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이속되었다.

이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부일면(府一面)·부이면(府二面)·남면(南面) 전체와 북일면(北一面) 일부가 통합되어, 15개 리로 개편되면서 안성군 죽이면(竹二面)으로 불리다가 이 후 이죽면으로 개칭되었고, 1992년에 다시 죽산면으로 개칭되었다.

산지로는 북단에 비봉산, 동쪽에 황색골산, 남서쪽에 덕성산, 서쪽 면계에 도덕산·칠장산·칠현산 등 400∼500m의 산자락이 커다란 병풍을 만들었다. 산지 사이사이를 흐르는 용설천·당목천·칠장천·죽산천 등의 하천유역에 충적평야가 조성되었고, 용설·장계 저수지가 관개용수 역할을 한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 이외에 담배·고추의 산출이 주목된다. 목축업도 활발하여 젖소·돼지·사슴·산양 등의 사육량이 비교적 많다. 제조업으로는 두교리에 두교산업단지와 장원리에 장원산업단지가 조성중이며, 면내에 석재·콘크리트·통신기기 등의 업체가 분포한다.

교통은 면의 북단을 가로지르는 38번 국도와 중앙을 종단하는 17번 국도가 대표적인 도로망이다. 이 외에 9·17번 시도가 있다.

문화유적은 칠장리의 칠장사에 칠장사 오불회괘불탱·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안성 봉업사지 석조여래입상·칠장사 삼불회괘불탱·인목왕후 어필 칠언시·칠장사 당간·칠장사 대웅전·칠장사 소조사천왕상, 죽산리에 오층석탑·삼층석탑·당간지주·석불입상·죽산향교 등이 있다. 매산리에 석불입상·죽주산성이 있다.

죽산(竹山)·매산(梅山)·장원(長院)·두현(斗峴)·장릉(長陵)·장계(長溪)·용설(龍舌)·칠장(七長)·당목(唐木)·두교(斗橋) 등 10개 리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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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1917)
안성시(http://www.anseong.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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