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림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황포군관학교 교관,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간부단 참모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이칭
이칭
김훈, 양녕, 피스더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1년(고종 38)
사망 연도
1936년
출생지
평안북도 출신
정의
일제강점기 때, 황포군관학교 교관,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간부단 참모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개설

중국공산당원. 평북 출신. 본명은 김훈이며 양녕, 피스더라고도 불렸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19년 3·1운동 때 아버지와 함께 서울의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는데, 이 시위에서 아버지가 죽었다. 그 뒤 지하비밀운동에 참가, 이 활동으로 일본 경찰의 수배를 받게 되자 이추각에게 항일운동을 계속할 것을 당부하는 요지의 편지를 남긴 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20년 중국의 통화(通化)에 가서 그 곳의 조선인들과 함께 조국의 독립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1년 윈난[雲南]에 있는 강무당(講武堂) 포병과 제16기로 입교, 1924년 졸업하였다.

이곳에서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학습하면서 공산주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1925년 광주(廣州)로 가서 황포군관학교(黃浦軍官學校) 교관이 되었고, 뒤에 제3기 학생대장을 지냈다.

1925년 2월 중국의 광둥[廣東]정부가 전개한 제1차 동정(東征)에 참여하였다. 이 해 6월 동정군을 따라 동강으로부터 광주로 돌아와, 운남군 총사령관 양회민과 광서군 총사령 유진환이 광둥정부를 전복할 목적으로 일으킨 반란을 평정하는 전투에 참여하였다. 그 뒤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이 해 11월 광둥성 고요현에서 창건된 국민혁명군 제4군 독립단(단장: 엽정) 제3영 영장이 되었고, 반동 지주들의 무력을 진압하였다.

1926년 4월 중국공산당의 지시로 황포군관학교로 돌아갔는데, 1927년 4월 장개석의 쿠데타로 황포군관학교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전개하던 당원과 공산청년당원 등이 참혹하게 학살되고 감금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1927년 8월 중국공산당의 결정에 따라 소련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1930년 봄, 소련 유학을 마치고 중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에 배치되었다. 동만주에서 농민무장을 적극 조직하고 연길, 화룡, 왕청 등지에서 한인과 중국인들을 선동하여 지주와 군경의 무기를 빼앗아 후일 반일유격대를 세우는 데 큰 역할을 수행, 동만특별위원회의 위원 겸 군사위원회의 서기의 책임을 맡았다.

1930년 12월 연길을 중심으로 한 동만주 지방 주민들을 이끌고 일본이 연변에 군대를 증가시키는 것을 반대하고 광주(廣州)봉기 3주년을 기념하는 군중대회를 열었다. 1931년 겨울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에 소환되어 군사위원회 서기직을 담당하였다. 1932년 초 만주성위원회 서기인 나등현과 함께 항일무장투쟁을 제기하는 문건을 작성하였다. 그 뒤 이 문건을 바탕으로 6월 2일 반석공농반일의용군(일명: 반석유격대)이 창군되었다.

1932년 가을, 강서성 중앙소비에트 구역으로 전임된 뒤 1934년 1월에 열린 소비에트 제2차 대표회의에 참가하였다. 그 해 10월 홍군이 장정을 시작할 때 중앙군사위원회 간부단 참모장이 되었고, 1936년 2월 15군단 75사 참모장이 되었다. 1936년 2월 22일 황하를 건너는 작전을 진행하다 복부에 총상을 입고 죽었다.

참고문헌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사』(신주백, 아세아문화사, 1999)
『불멸의 투사』(민족출판사, 1982)
집필자
신주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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