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에 경상남도 함안군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양창준(梁昌俊)이었으나 해방 이후 양우정(梁又正)으로 개명했다. 대구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했다.
1926년에 동아일보사 함안지국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으며 1928년에는 조선청년총동맹 경남도연맹 집행위원, 함안청년동맹 위원장이 되었다. 청년운동을 진행하면서 양우정(梁雨庭)이라는 필명으로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고,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과 관계를 가지게 되면서 사회주의적인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1930년에는 카프의 실질적 기관지로 『군기(群旗)』 발행을 맡았지만 내분을 일으켜 1931년 4월에 카프에서 제명되었다. 함안으로 내려가 함안농민조합에서 활동하다가 1931년 10월에 ‘중국공산당 동만(東滿)특위 조선국내공작위원회 사건’에 연루되어 검거되었으며, 1934년에 전향하고 석방되었다. 1935년에는 함안 등지에서 프롤레타리아문예협회를 조직했다는 혐의로 또 검거되었으나 곧 풀려났다.
해방 후에는 『대동신문(大東新聞)』, 『현대일보(現代日報)』에서 주필을 맡았으며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선전부장 등을 지냈다. 1948년에 『평화일보』를 창간했으며 독립정신보급회에서 『이승만대통령 독립노선의 승리』를 펴냈다. 1949년에는 『연합신문』을 창간해서 연합신문사에서 『이대통령투쟁사』, 『이대통령건국정치이념』을 펴내 일민주의(一民主義)를 체계화하는 역할을 했다. 1950년에는 함안에서 출마해 국회의원이 되었으며, 1951년에는 자유당 정무국장, 국민부장, 경남도당부 위원장 등을 지냈다. 1953년에 연합신문 주필인 정국은(鄭國殷)이 간첩혐의로 체포되자 사장인 양우정도 구속되었으며, 범인은닉 등으로 징역 7년의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 해 12월에 자유당에서 다른 족청계 인사들과 더불어 제명되었으며 국회의원직도 사임했다. 1954년에 대통령특사로 풀려났으나 그 뒤 본격적인 정치활동으로는 복귀하지 못한 채 1975년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