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마희(龍馬戱)’ 또는 ‘용말놀음’이라고도 한다. 이 놀이는 조선조 말엽까지 행해지다가 중단되었는데, 최근에 복원되어 재현된 바 있다. 이 놀이에 대한 기록이 옛 남원읍지인 ≪용성지 龍城誌≫에 전한다.
그 내용은 “고을 풍속에 옛적부터 악귀를 제어하고 재앙을 쫓는 외에 또 그해의 풍년과 흉년을 점치기 위하여 용마놀음을 하였다. 고을이름이 용성(龍城)인 데서 용마놀음이라 한 듯하다. 매년 섣달그믐이나 정월대보름에 그 사는 곳을 남과 북 두 편으로 나누어 각각 큰 용마를 만들어 모두 오체(五體)에 용의 무늬를 그린 뒤 외바퀴수레에 실어 거리로 나오면서 백가지 놀음으로 대진하여 승부를 겨룬다. 남쪽이 이기면 풍년이 들고, 북쪽이 이기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그 유래가 오랜 고로 관가에서도 금하지 아니하고 간혹 도와주기도 하더라.”로 되어 있다.
이 기록이 너무 간단하여 놀이의 규모와 내용을 자세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남원시 산내면 지리산 기슭 달궁(達宮)마을은 마한 6대 임금인 효왕(孝王) 30년(서기전 84)경부터 10대 임금인 학왕(學王) 3년(서기전 13)까지 71년 동안 마한의 도읍지였다.
이 마을은 높이 약 1,000m나 되는 고원지대로서 비가 오지 않으면 농사를 전혀 지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지리산 상봉(上峰)에 올라가 해마다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는데,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검은 구름이 산봉우리를 뒤덮고 하늘로부터 용이 비를 몰고 내려와서 농사를 잘 지을 수가 있었고, 지리산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방으로 크고 작은 강과 냇물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강과 냇물에서는 많은 용들이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여 남원지방의 곳곳에는 숱한 용소(龍沼)들이 있다고 한다. 이 용의 덕분으로 한재와 수재 없이 잘 살아오던 마한 땅은 그 뒤 백제가 전역을 점령하여 나라를 세우자 백제에 합병되었다.
그 뒤 백제에 풍년이 들자 백제왕은 남원이 고대로부터 용 때문에 잘 사는 고을이라 하여 고룡군이라 이름하고, 후손들이 용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하여 ‘용마놀이’를 하게 하였다고 전한다.
남원은 고대로부터 고룡군(古龍郡) · 용성부(龍城府) 등으로 불렸으며, 교룡산성(蛟龍山城) · 청룡사(靑龍寺) · 용성관(龍城館) · 용추촌(龍湫村) · 고룡서원(古龍書院) 등 용자가 든 수많은 곳과 건물이 있음을 본다.
옛날 남원부사들은 이 지방 특유의 민속놀이인 용마놀이를 후손들에게도 전승하게 하고 남원 부민들의 협동심 강화를 위하여 적극 후원하고 남원의 연중행사 중에서 제일 큰 행사로 삼아왔다.
이 놀이는 남원성을 중심으로 남북 두 편으로 나누어 하였으며, 싸워서 이기는 결과를 보고 그해의 풍년과 흉년을 점쳤는데, 부민들은 남쪽의 승리를 은근히 빈다고 한다. 그들은 남쪽이 이기면 풍년이 들고, 북쪽이 이기면 흉년이 든다고 믿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