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4년(효공왕 8) 주조. 높이 86.0cm. 일반적인 통일신라종에 비해 조금 왜소한 크기이며, 형태·주조기술면에서도 거칠고 미숙한 점을 볼 수 있다. 그러나 904년에 제작되었다는 뚜렷한 명문을 지니고 있어, 통일신라 말기 범종 연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용두(龍頭)는 그 입을 천판(天板) 위에 붙이고 있으며, 뒤에 붙은 형식적으로 약화된 음통(音筒)에는 사격자문(斜格子文)의 띠로 구획한 뒤 그 내부에 앙·복련(仰覆蓮)의 연판문으로 장식하였다. 종신의 상·하대에는 당좌(撞座)를 반으로 자른 것 같은 반원권의 문양을 연속으로 배치하고, 이 원권 내부에는 보상화문(寶相華文)과 당초문을, 그리고 원권 사이의 여백면에는 팔메트(palmette : 방사상)형의 당초문으로 장식하였다. 상대 아래 4곳에 배치된 방형의 연곽대에는 상·하대와 동일한 형태의 문양으로 시문하였고, 연곽 내부에는 연꽃봉오리 형태의 연뢰가 9개씩 높게 돌출되었다.
당좌는 종신 앞뒷면 두 곳에 배치되었는데 통일신라 중기의 종에 비해 훨씬 아래쪽인 하대쪽으로 치우쳐 있는 점이 주목된다. 당좌는 5개의 연과(蓮顆)를 배치한 원형의 자방과 그 주위를 복엽(複葉)의 7엽연판문으로 장식하고, 다시 외구를 소문(素文)으로 처리한 뒤 그 전체를 연주문대의 원권으로 둘렀다.
당좌 사이의 종신 앞뒷면에는 동일한 형태의 주악천인상(奏樂天人像)이 1구씩 부조되어 있는데, 구름 위에 앉아 머리 위로는 천의(天衣)를 흩날리며 양손을 들어 배 앞에 놓인 장고를 치는 모습이다. 이 주악상은 8∼9세기 범종과 비교할 때 자세가 경직되고 생동감을 잃고 있으며, 종의 규모에 비해 지나치게 크게 묘사되어 연곽 아래로부터 거의 하대까지 이르고 있다.
한편 이 종에는 당좌와 주악천인상 사이에 해당되는 종신의 한쪽 여백면을 택해 별도의 장방형 명문구(銘文區)를 만들고 좌서(左書)의 양각명으로 ○天復四年甲子二月 日松山村 大寺鑄成 內節本和上能與(興)本村主 連筆一合入金五千八十方(斤)盒掃成(천복4년 갑자2월 일송산촌 대사주성 내절본화상능여(흥)본촌주 연필일합입금5천80방(근)합소성)○이라고 기록하였다. ○천복 4년○은 904년에 해당되며 송산촌(松山村)에 있었던 대사, 즉 큰절에 사용된 종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