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산별신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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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산별신제 / 진대베러 가는 장면
은산별신제 / 진대베러 가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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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부여군 은산면 은산리에 전승되어 오는 마을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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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은산면 은산리에 전승되어 오는 마을축제.
내용

1966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은산별신제가 언제부터 시작되었으며 무슨 연유로 제를 지내게 되었는지를 고증할 만한 문헌은 충분하지 않다.

예로부터 은산은 부여읍에서 서북쪽으로 첫 역원(驛院)이 있었던 곳으로, 인근의 농산물이 집산되었고 5일마다 큰 장이 섰다. 은산마을 뒷산을 당산(堂山)이라고 부르는데, 그곳에는 옛날 토성(土城)이 있었던 흔적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당산 서쪽은 절벽이며 그 아래로 은산천(恩山川)이 흐른다. 당산의 남쪽에는 고목이 울창한 숲이 있고, 이 숲속에 별신당의 당우(堂宇)가 있다. 당우는 전형적 기와집으로 한 칸의 방과 마루로 되어 있다.

당우 정면에는 산신(山神)이 안치되어 있고 동편 벽에는 복신장군(福信將軍), 서편 벽에는 토진 대사(土進大師)의 위패와 초상화가 각각 봉안되어 있다.

주신(主神)으로 산신을 모셔놓은 것으로 보아 원래는 산신당이었는데 후대에 와서 두 신을 더 모시게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복신장군은 백제 제30대 임금 무왕의 조카인 귀실복신(鬼室福信)일 것이며, 토진 대사는 도침 대사(道琛大師)의 오기(誤記)가 아닐까 생각된다. 왜냐하면 두 사람은 다 같이 신라에 망한 백제의 재건을 꾀하였던 충신이었기 때문이다.

은산별신제에는 다음과 같은 기원전설이 있다. 옛날 은산 지방에 전염병이 유행하여 마을에서는 날마다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었다. 어느날 마을의 한 노인이 잠시 낮잠이 들었는데, 백마를 탄 한 장군이 나타나 하는 말이 “나는 백제를 지키던 장군인데 많은 부하와 함께 억울하게 죽어 백골이 산야에 흩어져 있다.

그러나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어 영혼이 안정을 못하고 있다. 그러니 그들을 잘 간수해 달라.”고 청하면서 그렇게 해주면 마을에서 역질을 쫓아내 주겠다는 것이었다.

노인이 깜짝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다. 노인은 마을사람들을 모아놓고 꿈 이야기를 하고 백마 탄 장군이 꿈에 가르쳐준 장소에 가보았더니 과연 백골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마을사람들은 역질을 없애주기를 바라면서 백골을 정성껏 주워모아 무덤을 만들어 장사를 지내주었다. 그랬더니 마을에서 역질이 없어져 사람들은 평안하게 살 수가 있게 되었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 마을사람들은 “병마를 없애고 마을을 태평하게 해 주십사.” 하며 사당을 짓고 백제의 장군을 제사지내게 되었다. 그 제사가 곧 오늘날의 별신제이다. 별신제는 3년에 한 번씩 정월에 지내는 일이 많다. 그러나 윤달에는 지내지 않는다.

별신제에 앞서 연말께 행사진행을 위한 기성회가 마을 원로 유지들에 의해서 구성되고, 경비조달·절차 등의 준비와 함께 임원을 선출한다.

임원은 기성회에서 선정되며 대개 대장 1명, 중군 1명, 사령집사 1명, 선배비장(先陪裨將) 2명, 후배비장 2명, 통인 1명, 화주 1명, 육화주 1명, 별좌 3명, 축관 1명 등으로 구성된다. 이 밖에도 무당·조화자(造花者)·공인(工人)·농악수·기수·재물운반인 등 거의 100명이나 되는 사람이 필요하게 된다.

임원 중에서 가장 명예로운 직책인 대장은 덕망과 재력이 있는 사람이 뽑힌다. 대장은 물론 임원들 모두가 부정한 일이 없는 깨끗한 사람이어야 한다. 상을 당하였거나 시체를 보아서도 안 되며, 산고(産苦)가 있거나 살생을 한 사람이어서도 안 된다.

임원들 중에 부정한 사람이 끼어 있으면 별신제를 지내도 영검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신령의 노여움을 사서 마을에 재화(災禍)가 생긴다고 이곳 주민은 믿고 있다.

당굿을 할 때에는 기(旗) 끝에 방울을 매달아 둔다. 무녀가 가무를 해서 방울이 울리면 신의(神意)를 얻은 것이 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임원 중에 부정한 사람이 있어 신이 감응하지 않는 것으로 믿는다. 이럴 때에는 추운 밤이지만 은산천의 얼음을 깨고 찬물에 목욕재계를 다시 한다.

별신제는 동원되는 인원의 규모도 규모려니와 여느 제의보다 기간도 길다. 또, 임원들은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집안일을 못하고 제사지내는 데 동원되어 진력하게 된다. 따라서 경비도 많이 들었는데 이 경비는 걸립(乞粒)으로 충당하였다. 1986년 이후에는 은산별신제보존회가 법인으로 결성되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제의는 진대[陣木] 베는 행사로부터 시작되어 장승을 세우는 것으로 끝이 나는데, 그 기간은 약 2주 정도 걸린다. 제1일은 산에 가서 나무를 베어 오는 진대 베기, 제3일은 꽃받기, 제5일은 별신 올리기, 제6일부터 9일까지는 행군과 축원굿, 제10일은 별신 내리고 하당굿, 제12일은 화주에 의한 독산제, 제13일은 새벽에 장승 세우기로 끝이 난다.

별신 올리는 상당굿 때에는 무당에 의해서 『별신축원가』가 불려지고 강신할 때까지 굿을 하며 축원을 할 때에는 『별신축원가』와 함께 12거리굿 중에서 임의로 굿거리를 노래한다. 하당굿 때에는 시장 번영과 임원을 위하는 자리이므로 『축원가』와 『노랫가락』을 부르며 임원·주민들과 함께 춤을 춘다.

1930년대까지도 별신제 때 서커스단이 들어오고, 연일 난장판이 벌어지고 음주가무의 구경거리가 있었으며, 학교 수업도 임시로 휴교를 했으나, 지금은 자연적인 난장이 사라지게 되면서 별신제의 축제적인 분위기도 상당히 쇠퇴하였다.

은산별신제는 백제의 멸망사와 관계가 있는 장군제(將軍祭)라는 점이 그 특징의 하나이다. 은산은 지리적으로 부여읍과 인접해 있을 뿐 아니라 마을 뒷산의 당산은 바로 백제의 고성이 있던 자리로서 지금도 그 자취가 여기저기 남아 있다.

따라서 별신제의 기원전설이 말하는 것처럼 장군이 그의 부하와 함께 전사하였을 가능성은 충분한 것이다. 별신제의 신은 복신과 도침인데, 이 두 사람은 백제의 재건을 계획한 충신들이며 또한 영웅들이다. 이 제의 속에는 중국과 우리 나라의 옛 명장들의 이름이 나열된 장군축(將軍祝)이 있다.

나라를 잃은 장군의 애화를 담은 향토제이기에 제의의 성격도 장군제가 되어 승마하거나 융복(戎服:철릭과 주립으로 된 옛 군복의 하나)을 입거나 진을 치는 등의 의식이 등장하였던 것이다.

은산별신제는 향토신제(鄕土神祭)가 목적하는 제화초복(除禍招福)을 그대로 반영시킨 일면도 있다. 또한, 원혼을 위안함으로써 안태(安泰)를 이루는 향토신앙의 성격도 그대로 지니고 있다.

1966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기예능보유자로 유상렬(劉尙烈 : 대장)·백남식(白南植)·이어인련(李於仁蓮 : 무녀), 뒤에 석동석(昔東錫 : 화주), 차진용(車鎭龍 : 대장)이 지정되었으나 모두 사망하였고, 현재 기예능보유자로는 박창규(朴昌奎 : 화주)·황남희(黃南嬉 : 무녀), 송병일((宋炳鎰: 화주)이 있다.

참고문헌

『은산별신제 연구』(홍태한, 민속원, 2016)
『은산별신제』(이필영, 화산문화, 2002)
『중요무형문화재해설』(문화재관리국, 1985)
「은산별신제(恩山別神祭)」(임동권, 『문화재』 2, 1966.11.)
집필자
임동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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