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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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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목이 짧은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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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골짚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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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목이 짧은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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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독특한 형태가 없이 족의(足衣)로서 신발의 일반적 의미를 가지며, 혜(鞋)·비(扉)·구(屨)·극(屐)·석(舃)·갹답(蹻踏) 등 신목이 짧은 모든 신을 말하는 것으로 남방족계의 신이다. 이의 기원은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 의복재봉변증설(衣服裁縫弁證說)에 의하면 “황제의 신 어측(於則)이 처음으로 만들었는데 풀로 만든 것은 비, 마(麻)로 만든 것은 구, 가죽으로 만든 것은 이라고 하였다.
진문공(晉文公)은 목극(木屐)을 만들었고 이윤(伊尹)은 마구(麻屨)를 만들어 신었다.”고 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부여의 혁답(革踏), 마한의 초갹(草蹻)·초리(草履)·초갹답(草蹻踏)과 같이 가죽이나 풀을 사용하여 만들어 신었다. 이와 같이 삼국시대 이전부터 부여·마한에서 초리를 신었다는 기록은 『통전 通典』「변방동이조 邊方東夷條」에서 볼 수 있다.
고구려시대에는 상류계급에서 황혁리를 신었다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 벽화 중 무용총 오벽(奧壁) 벽화의 주인인 듯한 사람은 흑색리를 신고 있다. 백제에서는 왕복에 오혁리를 신었다. 신라시대의 이로서는 경주 식리총(飾履塚)에서 포백(布帛)·사제(絲製)의 이를 발견할 수 있으므로 황혁리와 초리, 신라의 마리(麻履)가 우리 나라 최고(最古)의 신임을 알 수 있다.
이밖에 이의 유물로는 나주 반남면 옹관분(甕棺墳) 출토의 금동리, 경주 금관총 출토의 금동식리 중 소식부투조리(小飾附透彫履)와 화형좌식부전리(花形座飾附戔履)가 있다. 양산 북정동 고분 출토의 금동식리, 양산 부부총 출토의 금동식리, 경주 식리총 출토의 금동식리, 경부 금령총 출토의 금동리, 공주부근 출토의 금동투각리, 백제 무령왕릉 출토의 금동리 등 많은 유물이 있다.
그런데 이들 금동리들은 모두가 금속제로서 동판에 무늬를 투각하였다. 신바닥에는 여러 개의 못이 박혀 있어 일상 실용의 신발이 아니라 지배자를 상징하는 의례용 신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흥덕왕 복식금제에 나타난 이의 재료를 보면, 진골에서 4두품까지는 사(紗)·마·나(羅)·피제(皮製)의 신을 신었고, 평민은 나를 금하고 피·마제만 사용한 것을 볼 수 있다.
고려시대의 신에 대하여는 『고려사』와 『고려도경 高麗圖經』을 참고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의종 때에 명나라 태조로부터 받은 제관복 중에 흑리가 있었고, 또 6군이 혁리를 신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고구려시대의 화가 고려 때에 와서는 이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국사(國師)는 오혁영리(烏革鈴履)를, 조례(早隷)는 오혁구리(烏革句履)를, 서인들은 초리·구리를 신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는 복식의 발달과 더불어 계급적 차별도 심하여 복식금령이 많았다. 태종 때 관복색을 설정하였을 때 백관복 1품에서 9품까지 흑리를 신게 하였고, 『경국대전』에 기록된 백관의 조복·제복에는 1품에서 9품까지 흑피혜로 규정되어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조선 전기에는 관복에 흑피혜와 흑리가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조선말 백관복에서는 태사혜를 볼 수 있다. 승녀(僧女)는 피혜사용을 금하고 유생은 마혜를 신도록 되었는데, 이 제도는 조선말의 흑혜나 운혜로 이어진다. 서민복에는 초리와 마혜·지혜(紙鞋)를 착용하였는데 조선 중기에는 나막신도 사용되었다. 여자의 대표적인 신으로는 운혜가 있었다.
운혜와 당혜는 귀족부인들이 신었고, 일반 부녀자는 피제의 운혜나 초혜·나막신·징신 등을 신었다. 신의 재료도 다양하게 발달되었으니, 혁리·초리·마혜와 사라능단의 혜, 목극, 지혜 등이 그것이다. 특히, 짚신[草履]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지닌 남방계통의 신으로 북방계통의 화와 대응되는 우리 신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삼국시대에는 주로 귀족계급에서 이를 신었고, 통일신라시대에는 화와 이가 병용되었다. 고려 초에는 이만을 사용하다가 고려말에는 화를 사용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이를 대표적인 신으로 사용하고 화는 상류계급에서만 허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이와 화의 이중제도는 조선 말기까지 전통을 지녀왔으며, 삼국시대 이래로 조선말까지 우리 나라 신의 기본구조를 이루면서 발전해왔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조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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