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주(慶州). 아명은 이용구(李龍九), 개명하기 전 본명은 이갑룡(李甲龍)이고, 필명은 이무영(李無影)·탄금대인(彈琴臺人)·이산(李山)이다.
1908년 1월 14일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태어났다. 1916년 4월부터 1920년 3월까지 충청북도 중원군 신니면에 있는 사립 용명학교를 다녔다. 1920년 4월 경성의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다니다가 1925년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같은 해 일본 중학교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같은 해인 1925년 성성중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작가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4년 동안 작가수업을 받았다.
1926년 6월 잡지 『조선문단』에 단편소설 「달순의 출가」로 등단하였다. 이후 1927년 5월 『의지할 곳 없는 청춘』, 1928년 『폐허의 울음』을 발간하였고, 이즈음 일본작가들의 모임인 ‘20일회’에 참여하였다가 1929년 귀국하였다.
농민문학을 특기로 하는 이무영은 문단활동을 하면서 경성부 삼선소학교 교원과 출판사와 잡지사 직원을 전전하다가 1931년 『동아일보』 희곡 현상공모집에 「한낮에 꿈꾸는 사람들」로 당선되었다. 1932년 7월 좌우파를 아우른 문인친목단체인 조선문필가협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33년 2월 문예지 『문학타임스』를 창간하는 한편 8월 문학동인 구인회 회원으로 활동하였고, 10월 『문학타임즈』 제호를 『조선문학』으로 바꾸어 창간하였다. 1935년 5월 동아일보사 학예부 기자가 되어 재직하다가 1939년 7월 퇴사하고 경기도 시흥군 군포에서 농업에 종사하며 농민문학 창작에 열중하였다. 이 시기 이무영의 대표작이자 농민소설의 명작으로 평가되는 「제1과 제1장」(1939), 「흙의 노예」(1940)를 발표하였다. 1940년 4월 경성보육학원에서 조선문학과를 담당하며 생도감 겸 서무주임으로 재직하다가 1941년 3월 사임하였다.
1942년 9월 조선문인협회 상임간사로 활동하면서부터 일제 체제협력 의도를 본격적으로 표출하기 시작하였다. 같은 해 12월 26일부터 1943년 1월까지 조선문인협회 파견으로 만주국 간도성 조선인 개척촌을 시찰하고 2월 민간 내선일체를 주창하는 단체인 녹기연맹의 기관지 『녹기』에 「간도성시찰작가단보고」를 발표하였고, 2월 16~17일에 『경성일보』에 「간도를 여행하고」를 기고하였다. 1943년 2월 3일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주최한 예술부문 관계자 연성회에 참가하고, 5월 4일부터 5월 9일까지 조선문인보국회 결성기념 문예전에 참가하였다. 6월 조선문인보국회 소설희곡부회 간사에 위촉되었고, 8월 4일 징병제 감사결의 선양행사인 ‘낭독과 연극의 밤’에서 이른바 ‘네거리소설’ 인 『역전(驛前)』을 낭독하였다. 1944년 6월 조선문인보국회 소설부회 간사장으로 임명되었고, 같은 달 일본문학보국회 주최로 도쿄[東京]에서 열린 ‘문학자총궐기대회’에 출석하였고, 일본에 있는 조선 농민과 병사를 위문하였다. 1945년 8월 조선문인보국회 소설부회 회장에 선임되었다.
이 시기 작품활동을 통해서 일제 침략전쟁과 전사자를 찬양하고, 지원병 징병을 선전, 선동하였고, 침략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조선인의 협력을 독려하면서 일제의 전시식민정책에 적극 협력하였다. 대표적인 글로 「대동아전쟁에 의해서 무엇을 배웠는가」(『국민문학』, 1942.2), 「푸른 기와집」(『부산일보』, 1942.9.81943.2.7), 「이날이 되어」(『경성일보』, 1942.12.16), 「국어문제회담」(『국민문학』, 1943.1), 『대동아전기』(이무영·이태준 공저, 인문사, 1943.1), 「향가」(『매일신보』, 1943.5.39.6), 「용답(龍沓)」(『반도의 빛』, 1943.8), 「역전」(『조광』, 1943.9), 「화굴(花窟)이야기」(『국민총력』, 1944.4), 『정열의 책』(동도서적, 1944.4), 「결전문학 수립을 위하여」(『문학보국』, 1944.8), 「소개산 전훈 2」(『매일신보』, 1945.5.5) 등이 있다.
해방 후 경기도 군포에 칩거하다가 1946년 3월 전조선문필가협회에 참여하며 활동을 재개하였다. 서울대학교 문리대에서 소설론을 강의하였고, 『흙의 노예』(조선출판사)를 발간하였다. 같은 해 발표한 『굉장소전』(『백민』, 1946.12)에서는 친일파 청산을 폄훼하였다. 1947년 연희대학교 문과대에 출강하는 한편 좌익의 ‘조선문화단체총연맹’에 대응해서 조직한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문총) 최고위원을 맡았다. 1949년 12월 전국문필가협회 문학부와 한국청년문학가협회가 중심이 되어 결성한 한국문학가협회에 참여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해군 소령으로 입대해 해군의 정훈교육을 담당하였고, 10월 문총구국대 기획위원을 맡았다. 1951년 해군 진해통제부 정훈실장으로 승진하였고, 1952년 충무공 동상제작을 지휘하였다. 1953년 2월 대령으로 진급하면서 해군정훈감에 취임하였고, 숙명여대 문리대 강사로 출강하였다. 1954년 서울로 돌아와 국방부 정훈국장에 임명되었고, 1955년 해군 대령으로 예편한 후 국방부 정훈국 자문위원 겸 해군기술연구소 이사,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최고위원, 펜클럽 한국본부 중앙위원, 자유문학자협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6년 7월 영국 런던에서 열린 제28회 국제펜클럽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고, 같은 해 자유중국 정부 초청으로 한 달간 중국교육문화계를 시찰하였다. 1960년 4월 21일 뇌일혈(일설에는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문인장으로 서울특별시 성북구 창동의 천주교묘지에 묻혔다.
해방 후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여 「삼년」, 「세기의 딸」, 『무영농민문학선』, 『소설작법』, 「이순신」, 「B녀의 소묘」, 「노농」, 「팔각정이 있는 집」, 「농부전초」, 『해전소설집』, 「벽화」 등을 발표하였다.
1943년 2월 「푸른 기와집」으로 신태양사가 주관하는 조선예술상 총독상을 수상하였다. 해방후 1956년 4월 「농부건초」로 제5회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하였고, 1985년 충청북도 음성에 ‘이무영선생문학비’가 건립되었고, 1994년 4월 21일부터는 음성문화원이 주최하고 동아일보가 후원한 ‘무영제’가 해마다 4월에 열리기 시작하였다. 1998년부터는 한국예총 음성지부에서 ‘무영제’를 주관하였다. 1995년 4월에 ‘이무영선생문학비’가 세워진 설성공원 앞이 ‘무영로’로 명명되었고, 2000년에는 동양일보사가 주관하고 음성군이 후원하는 ‘무영문학상’이 제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