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도(景道)이다.
1873년 식년시 생원으로 합격하였고, 1885년 문과에 합격한 뒤, 1887년 영국·러시아·이탈리아·프랑스 주재 참찬관을 비롯하여 규장각직각·교서관교리로 발령을 받았다. 1890년 남양부사, 1892년 장흥부사가 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고부군 민란의 진상을 조사하고 진정시키기 위한 고부군 안핵사로 임명되었다. 부임 후 현지 주민을 학대하고 약탈하는 등의 만행을 강행하여 동학농민혁명을 더욱 촉발시켜 결국 파직당했고, 그 해 4월부터 1895년 6월까지 경상북도 김산군에 유배되었다.
1897년 중추원2등의관, 1899년 평리원재판장, 1900년 시강원첨사·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되었다. 또한 1900년부터 1907년까지 여러 차례 궁내부 특진관을 역임하였다. 1901년 초 3개월 정도 미국특명전권공사로 미국에서 활동하였고, 이후 의정부참찬으로 임명되어 특명전권공사를 겸임하였다. 이 해 5월부터는 일본주차로 발령 받았다. 1902년 의정부 참찬으로 임명되고 비서원경·임시서리평리원재판장사무·장례원장례·규장각학사 등을 겸임하였다.
1904년 의정부찬정·중추원부의장·내부대신·육군부장·호위대총관·관제리정소 의정관으로 발령을 받았고, 홍문관학사를 겸임하였다. 1905년 중추원찬의·규장각학사로 임명되었고, 학부대신임시서리사무를 겸임하였으며, 을사조약 체결에 협력한 대신의 처벌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1906년 궁내부대신임시서리사무를 비롯하여 예식원경·비서감경·경효전제조·원수부찬모관 등에 임명되었다. 이 해 9월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훈2등 팔괘장을 받았다.
1907년 나인영(羅寅永)·오기호(吳基鎬) 등이 을사오적을 살해하려는 계획에 운동자금을 제공한 사유로 경무청에 체포되었다. 평리원 평결로 10년 선고를 받고 이 해 7월부터 1908년 3월까지 전라남도로 유배되었다. 이후 기호흥학회의 찬무원으로 활동하였고, 통감부 시기 일본인 측량기사를 초빙하여 산림 측량 등을 비롯한 조선의 산림사업을 주관하였던 대한산림협회 명예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10년 10월 7일 한일합병에 기여한 공으로 남작 작위를 받았다. 1911년 1월 2만 5천원의 은사공채를 받았다. 1912년 8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고, 1915년 11월 다이쇼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22년 7월 사망하였고, 이 해 10월 양자 이중환(李重桓)이 작위를 물려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