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립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일으켜 활약한 공으로 명나라 황제로부터 은자패를 받았으며, 인산진첨절제사에 임명된 무신 · 의병장.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627년(인조 5)
본관
단양(丹陽)
주요 관직
훈련판관|인산진첨절제사(麟山鎭僉節制使)|병조참판
관련 사건
임진왜란|정묘호란
정의
조선 후기에,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일으켜 활약한 공으로 명나라 황제로부터 은자패를 받았으며, 인산진첨절제사에 임명된 무신 · 의병장.
개설

정묘호란 때의 의병장이다. 본관은 단양(丹陽). 동지중추부사 이광립(李光立)의 아우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무과에 급제하여 내금위에 보직되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쟁에 참여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소사싸움에서 전공을 세워 그 공으로 훈련판관이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안종록(安宗祿)·장린(張遴)·장희준(張凞俊)·김우(金佑)·이충걸(李忠傑) 등과 함께 의병 3,000여명을 모집하여 소위포(小爲浦)에 책(柵)을 설치하고, 후금의 침입군을 맞아 3일간 혈전을 벌인 끝에 많은 적병을 살상하고 승리로 이끌었다.

그 때 가도(椵島: 일명 假島)에 주둔하고 있던 명나라의 도독 모문룡(毛文龍)이 소식을 듣고 찾아와서 이정립의 전승을 축하하였으며, 조선조정과 본국정부에 그 사실을 보고하였다. 명나라 황제는 은자패(銀子牌)를 내렸고, 모문룡의 주둔지에서도 조총과 탄약·미포(米布)·은화(銀貨) 등을 보내왔다. 전공으로 인산진첨절제사(麟山鎭僉節制使)가 되어 대계도(大鷄島)에서 진을 치고 있다가 죽었다. 1648년 병조참판에 추증되고, 정문이 세워졌다. 1736년(영조 12)에 평안도 유학 계만장(桂萬長) 등이 안주에 있는 충민사(忠愍祠)에 추배할 것을 청한 바 있으나, 『증보문헌비고』 충민사 항(項)에 이정립의 이름이 없는 것으로 보아 실현을 보지 못한 것 같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인조실록(仁祖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여지도서』(국사편찬위원회, 1979)
집필자
이장희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