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한보 ()

유교
인물
조선전기 세자시강원 시강관, 판돈녕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이칭
자방(子房)
은계(銀溪)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본관
울진(蔚珍)
출생지
미상
주요 관직
판돈녕부사
정의
조선전기 세자시강원 시강관, 판돈녕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개설

본관은 울진(蔚珍). 자는 자방(子房), 호는 은계(銀溪).

생애 및 활동사항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약관 미만에 경사(經史)와 제자백가를 통달하여 문명을 떨쳤다. 신용과 명망이 두터워 주위에서 어려운 일을 당하면 그 해결책을 물어오고는 하였다.

1522년(중종 1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에 배속되었다. 1529년 사헌부 감찰이 되었으나 어렸을 때 손가락을 다쳐 자유롭지 못하다는 이유를 들어 규정관(糾正官)의 임무를 사양하였다.

이어 세자시강원의 시강관에 특채되어 오대(烏帶)와 학창의(鶴氅衣) 등 도인과 같은 복장으로 항상 궁중에 머무르면서 왕과 어려움이 없이 시도 짓고 문답도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금문우객(金門羽客)이라고 불렀다. 벼슬이 판돈녕부사에 이르자 상소하여 사퇴할 것을 청하였으나, 중종이 그 재주를 아까워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그 뒤 고향인 용궁현으로 돌아와 연못을 파고 축대를 쌓으며 손수 송죽을 심고 자연과 더불어 풍류를 즐겼다. 제자들과 더불어 경전을 강론하고 성리를 연구하면서 다시는 벼슬할 뜻을 두지 않았다. 관직에 있을 때는 부하 직원에게 문장과 재화의 명성보다 효도와 공경을 우선 행하여 진실된 인간이 되도록 지도하였다.

참고문헌

『국조방목(國朝榜目)』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
집필자
권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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