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해평 ()

장해평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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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조선일보 안악지국장, 임시정부 군자금 모금원 등으로 활동하며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이칭
이칭
기준(麒俊), 남용무(南容武), 이계백(李啓白)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5년
사망 연도
1965년
출생지
황해도 안악
정의
일제강점기 때, 조선일보 안악지국장, 임시정부 군자금 모금원 등으로 활동하며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개설

일명 기준(麒俊). 가명은 남용무(南容武)·이계백(李啓白). 황해도 안악 출신. 장운동(莊雲洞)의 아들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22년에 정주 오산중학교(五山中學校)를 3년 수료한 뒤 이듬해 조선일보 안악지국을 경영하다가 동향인 김구(金九)·오면직(吳冕稙) 등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24년 중국 후베이성[湖北省] 무한군관학교(武漢軍官學校)에 입학, 군사훈련을 받았다. 여기서 동교생 진공목(陳公木)·안재환(安載煥)·박시창(朴始昌) 등과 중국 군대의 기술교관으로 있는 백득림(白得林)·권준(權晙) 등을 중심으로 무한한인혁명청년회(武漢韓人革命靑年會)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을 조직화·체계화하였다.

1926년 5월 무한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 육군소위로 임관되어 중국군 제11로군(第十一路軍) 총사령 장발규(張發奎)부대에 배속되어 한중공동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얼마 뒤 제대하였다.

같은 해 12월 상해(上海)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군자금 모금원으로 임명, 국내에 밀파되었다. 경인지구를 왕래하면서 군자금 모금에 열중하다가 인천에서 일본경찰에 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1929년 출옥 후 다시 이병섭(李秉燮)·김지건(金知乾) 등과 군자금 모금운동을 재개하다가 일본경찰의 추적을 받자 상해로 탈출하였다.

같은 해 11월경 만주 일대의 군자금 모금 사명을 띠고 톈진[天津]에 도착하여, 아나키스트 이회영(李會榮)·이을규(李乙奎)·정화암(鄭華岩) 등과 회동하고 조선혁명당총동맹(朝鮮革命黨總同盟)에 가입, 일제침략의 수뇌부를 총살하고자 하였다.

한편, 오면직·김지강(金芝江) 등과 운동자금을 수합하기 위해 톈진 일본 조계(租界) 안에 있는 일본은행을 대낮에 습격하고 거금을 손에 넣어 군자금으로 활용하게 하였다.

1930년 이름을 남용무로 고치고 만주 해림한인제1소학교(海林韓人第一小學校)에서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1932년 다시 이계백으로 고친 뒤 모란강 길림(吉林) 등지를 거쳐 창춘[長春]에서 조선일보 및 조선중앙일보지국을 경영하다가 귀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광복투쟁의 선구자』(이현희, 동방도서, 1990)
『임정과 이동녕연구』(이현희, 일주각, 1989)
『한민족광복투쟁사』(이현희, 정음문화사, 1989)
『3·1독립운동과 임시정부의 법통성』(이현희, 동방도서, 1987)
『대한민국임시정부사』(이현희, 집문당, 1982)
『대한민국독립운동사』(김후경·신재홍, 한국민족운동연구소, 1971)
『한국아나키스트운동사』(하기락, 문서각, 1969)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이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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