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희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도승지, 대사간, 동의금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자순(子純)
양촌(陽村)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31년(인조 9)
사망 연도
1711년(숙종 37)
본관
동래(東萊)
주요 관직
경기도관찰사|대사헌·도승지·대사간|동의금부사
정의
조선 후기에, 도승지, 대사간, 동의금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자순(子純), 호는 양촌(陽村). 정창연(鄭昌衍)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조판서 정광경(鄭廣敬)이고, 아버지는 정지화(鄭至和)이다. 어머니는 이석망(李碩望)의 딸이다. 좌의정 정지화(鄭知和)에게 입양되었다. 효종의 넷째 부마인 동평위(東平尉)정재륜(鄭載崙)과는 재종간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60년(현종 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승문원부정자로 임용되어 『효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665년 이후 사헌부지평·장령·집의·사간원정언을 거쳤다. 홍문록에 뽑힌 뒤 홍문관수찬을 거쳐서 1674년에는 동부승지가 되었다. 집의로 재직 때는 진주목사가 환곡을 이용하여 부정축재한 사실을 적발하기도 하였다.

1680년(숙종 6) 경신환국 이후 승지로서 조지겸(趙持謙)과 함께 역관의 말만 믿고 연행에서 귀환한 정사 오시수(吳始壽)를 사사(賜死)한 결정은 잘못된 것이라 하여 송시열(宋時烈)을 비난하였다.

다음해에는 경기도관찰사로서 김석주(金錫胄)의 심복인 남두북(南斗北)을 비판하는 등, 노소 분열 초기부터 소론의 입장에 동조하였다. 이후 남인 재집권기까지 주로 대사헌·도승지·대사간을 역임하였다.

1694년 갑술환국이 되고, 폐서인(廢庶人)된 민비의 복위를 도모했던 노론 김춘택(金春澤), 소론 한중혁(韓重赫)의 옥사가 남인 민암(閔黯) 등의 옥사로 전복되었을 때, 동의금부사로서 국옥에 참여하였다.

이 때 그는 서문중(徐文重)과 함께 압슬 같은 혹형을 피하면서 재판을 신중히 진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당시 노론인 지평 정호(鄭澔)로부터 복위된 곤전을 위해하려는 민암 같은 무리를 옹호하려는 당파적 경향으로서 그 술수는 남곤(南袞)·심정(沈貞)과 같다고 하는 비난을 받고는 정치계에 환멸을 느껴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경기도 과천으로 돌아간 뒤 다시 관계에 돌아오지 않았다.

이 후 소론의 지도자인 남구만(南九萬)과 서문중이 계속 다시 임용할 것을 주장하여 대사헌·좌참찬·개성유수 등이 제수되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평안감사·예조판서가 제수되었을 때는 성외까지 왔다가 병을 칭탁하여 사직하고 그 날로 귀향하였다.

참고문헌

『현종실록(顯宗實錄)』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숙종실록(肅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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