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동래(東萊). 정태화(鄭太和)의 6대손이며, 정석인(鄭錫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연순(鄭淵淳)이고, 아버지는 정동호(鄭東祜)이며, 어머니는 이경승(李敬勝)의 딸이다.
1807년(순조 7) 생원시에 합격한 뒤 1813년(순조 1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17년 한권(翰圈)에서 3점을 얻었으나 한림소시(翰林召試)에서 낙방하고, 다시 2년 뒤에 한권에서 3점을 얻고 이듬해 한림소시에 김정희(金正喜)와 함께 합격하여 검열이 되었다.
이 후 여러 차례 청환직(淸宦職)을 역임하고, 1824년 겸춘추로 있으면서 사관을 선발하는 한림회권에서 상사와의 충돌로 인하여 중화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풀려나와 홍문록에 올랐으며, 1827년 정자를 거쳐 수찬이 되어 이조원(李肇源)과 함께 역모를 하였다는 혐의로 김기후(金基厚)의 처벌을 상소하였다.
이 해에 진전(眞殿) 작헌례(酌獻禮) 때 대축(大祝)으로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이듬해 대사간으로 발탁되었고, 1832년 이조참의를 거쳐 다시 대사간을 지낸 뒤, 이듬해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다. 문장에 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