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동윤(東潤)·이중용(李仲用)·하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한 뒤 서울의 방직공장과 연초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했다. 1930년 8월 무렵부터 중앙청년동맹과 경성목공조합에 가입해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1931년 10월 오기섭(吳淇燮)의 주선으로 강목구(姜穆求)와 함께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모스크바에 체류하고 있던 동안 1931년 11월 중순부터 3개월에 걸쳐 개최된 국제공산청년동맹 동양부위원회에 조선 대표로 참가해 조선의 공청운동 방침에 대해 협의했다.
이 회의에서 국제공산청년동맹 동양부 대표로부터 이론의 연구보다는 실천운동에 종사할 것을 권유받고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입학을 포기했다.
1932년 1월에는 고려공산청년회 재건방침을 규정한 「조선 공청 청년 제군에게 고함」(일명 ‘1월서신’)이라는 테제의 결정과정에 참여했다. 그 후 국내에서 공청재건운동을 벌이라는 국제공산청년동맹의 명령에 따라 강목구와 함께 ‘1월서신’을 갖고 모스크바를 떠나 귀국했다.
귀국 직전인 1932년 2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코민테른으로부터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관한 지시를 받은 바 있는 오기섭과 회합해 운동방침을 협의했다. 그 결과 지역을 분담해(강목구는 함경남도, 정태옥은 경기도, 오기섭은 경상남도) 농촌, 어촌, 광산, 철도, 부두, 공장 등에 들어가 좌익 청년을 규합하고 ‘3∼5명으로 구성된 공청재건그룹 →시·군위원회 →도위원회→중앙위원회’라는 순서로 공청을 재건한다는 원칙을 정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재건운동을 벌이되 재건그룹의 모체로 혁명적 농민조합·노동조합 운동도 전개할 것을 결정했다.
1932년 4월 서울의 각 중등학교에 문화써클을 결성한 뒤 우수한 학생을 선발해 공청반을 조직할 것을 협의했다. 같은 달 경성노동조합준비위원회의 이름으로 메이데이 기념투쟁을 선동하는 「전조선 노동자농민청년 제군에게」라는 제목의 격문을 배포했다.
1932년 7월 인천의 활동가들과 함께 반전(反戰)데이를 맞아 대중투쟁을 선동하는 격문을 살포했다. 1932년 8월 조선공산청년회 경성조직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같은 달 국제무산청년데이와 국치일을 맞아 대중투쟁을 선동하는 격문을 서울에 배포했다.
1932년 9월 조선공산청년회재건인천조직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1932년 10월 경성조직준비위원회의 기관지 『공산주의청년』과 인천조직준비위원회의 기관지 『붉은 노동하는 손』을 각각 발행했다.
1937년 6월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복역 중에도 같이 투옥되어 있던 강목구 등과 함께 옥중공산주의동맹을 조직하고 사상전향 문제를 다룬 유치장 내부신문을 발행하는 활동을 벌였다. 1945년 2월 옥사했다.
2008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