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5∼1958. 평양 출신. 1930년 평양숭인상업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농구를 시작하였으며, 그 뒤 보성전문학교를 거쳐 일본 릿쿄대학(立敎大學) 상학부(商學部)를 나오는 동안 계속 센터로 활약하였다. 농구를 시작한 지 불과 4년 만인 1934년에 만주·봉천·선양 등지에 원정하여 전승을 기록하였다.
1935년 전일본실업학교농구대회에 출전하여 우승하였다. 1937년 9월 4일 동안 개최된 전조선학생농구대회에 보성전문학교 대표로 출전하여 4년 만에 패권을 되찾는 데 기여하였다. 1939년 제13회 동계농구연맹전에 청년단 제1부로 출전하여 우승하였다.
그 뒤 릿쿄대학 시절에는 더욱 활약하여 전일본농구단의 센터로 1941년 필리핀에 원정하였으며, 1942년부터는 전일본농구선수권대회에서 3연승의 기록을 세우기도 하였다. 광복 이후에는 일제치하에서 침체되었던 우리나라 농구재건사업에 앞장섰다.
1946년에는 윤항섭(尹恒燮)·안영창(安永昌)·김창환(金昌煥) 등과 함께 고려펜싱클럽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1948년에는 현역선수로 다시 복귀, 국가대표 농구선수로 런던올림픽대회에 참가하였다. 그 뒤 고려대학교·경희대학교·이화여자고등학교·경복고등학교 등에서 코치와 강사를 역임하였다.
1958년 한국여자농구팀 코치로서 대만에 원정하였고, 대한농구협회 기술지도위원 겸 이사를 지냈다. 미망인과 대한농구협회는 생존시 그의 업적과 스포츠정신을 빛내고 우수한 농구인의 장래와 면학을 돕기 위하여 ‘조득준장학금’을 마련, 농구발전에 기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