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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성(崔容成)

근대사인물

 일제강점기 정의부 재무부집행위원, 국민부 외무집행위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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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일제강점기 정의부 재무부집행위원, 국민부 외무집행위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영역닫기영역열기생애 및 활동사항
별명은 고이허(高而虛). 황해도 수안 출신. 배재학교(培材學校)를 졸업하고 학생운동을 전개하였다. 만주 망명 도중 창춘[長春]에서 김영석(金永錫)의 소개로 김진호(金鎭浩)·변창근(邊昌根)을 만나 회덕현농우회(懷德縣農友會)에서 활동하다가 그 후 정의부(正義府)에 참가하였다.
1928년 11월 정의부 재무부집행위원으로 정의부소속 대대에 군복을 구입, 공여하였다. 1929년에는 국민부(國民府)의 교육위원장 및 조선혁명당의 중앙위원 겸 조직부책임자로 활약하였다. 같은 해 9월 27일 국민부의 외무집행위원이 되었다.
그해 11월에는 남만한인청년총동맹중앙간부(南滿韓人靑年總同盟中央幹部)로 피선되었다. 1930년 동성조선인농민총동맹상무집행위원(東省朝鮮人農民總同盟常務執行委員)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1월 흥경(興京) 교외에서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장 이호원(李浩源), 총사령관 김관웅(金寬雄) 및 이종건(李鍾建)·장세용(張世湧)·이규성(李奎星) 등 10여 명의 간부들이 일본경찰에 붙잡히자, 중앙집행위원장대리로서 조선혁명당의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즉 1만여 명의 군대를 맹훈련하는 한편, 중국의용군 총사령 이춘윤(李春潤)과 합작해 한중연합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1934년 8월(음력) 조선혁명군 총사령 양세봉(梁世奉)마저 순국하였다. 이에 전력 정비를 위해 조선혁명당, 조선혁명군을 통합한 조직 조선혁명군정부를 출범하였으며 중앙집행위원회장을 맡아 전선을 지휘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수사망이 집중되어 조선혁명군의 위세는 점차 약화되었다. 고군분투하던 중 일본관동군의 대토벌대가 흥경현 일대를 석권하면서 조선혁명군정부의 근거지를 포위공격하자 대항, 교전하였다.
그러나 부하들은 하나씩 전사하고 실탄마저 떨어지자 권총을 가슴에 대고 자결하고자 했으나 탄환이 다 떨어져 있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적의 포로가 되었다. 환인(桓仁)·봉천(奉天) 등지로 압송되면서 일본군의 혹독한 고문에 시달리다가 1936년 봉천에서 순국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상훈과 추모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6년)
김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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