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황주(黃州). 대상(大相) 최우달(崔祐達)의 아들이다.
어머니가 임신했을 때, 그 집 오이 줄기에 갑자기 참외가 맺혔다고 한다. 이웃 사람이 이를 궁예(弓裔)에게 고했더니, 궁예가 점을 쳐 생남하면 나라에 불리하니 기르지 말라고 해 부모가 숨겨 길렀다. 오경(五經)에 통하고 문장에 능했으며, 궁예가 “이른바 성인(聖人)을 얻는다 함은 이 사람을 얻는 게 아닌가!”라고 할 정도로 신임을 얻었다.
915년(신덕왕 4) 궁예가 왕건(王建)을 불러들여 이른바 관심법(觀心法)으로 모반의 누명을 씌울 때 이를 변명하자, 그 자리에 장주(掌奏)로 있던 최응이 일부러 붓을 뜰에 떨어뜨린 다음 주우려고 뜰에 내려가 왕건에게 “굽히지 않으면 위태롭다.”라고 귀띔해 주어 화를 면하도록 하였다.
왕건이 고려를 세우자 지원봉성사(知元奉省事)가 되었다가 광평낭중(廣評郎中)·내봉경(內奉卿)·광평시랑(廣評侍郎)을 역임하며 태조의 총애를 받았다.
항상 재계(齋戒)하고 고기를 먹지 않았는데, 병들어 누웠을 때 태조가 동궁(東宮)을 보내 병문안을 하고 육식을 권하며 “다만 손수 죽이지 않으면 될 것이지 고기를 먹는 것이야 무슨 해가 되리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굳이 사양하고 먹지 않자 태조가 그 집에 행차해 이르기를 “경이 육식하지 않으면 두 가지 손실이 있으니, 그 몸을 보전하지 못해 끝까지 어머니를 봉양하지 못함이 불효요, 명(命)이 길지 못해 나로 하여금 일찍 좋은 보필을 잃게 함이 불충이라.”하니 이에 비로소 고기를 먹어 병이 나았다고 한다.
또 태조가 “옛날에 신라가 9층탑을 세워 삼국을 통일했는데 개경에 7층탑을 세우고 서경에 9층탑을 세워 삼한을 합해 일가를 삼고자 하니 경은 나를 위해 발원소(發願疏)를 지어 달라.”라고 하자 이에 따랐다.
죽은 뒤 대광 태자태부(大匡太子太傅)가 증직되고 뒤에 다시 사도(司徒)가 증직되었다.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희개(熙愷)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