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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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자유만세」 · 「독립전야」 · 「국민투표」 등의 작품에 관여한 영화인. 영화감독 ·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칭
이칭
星寅奎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11년 12월 10일
사망 연도
미상
출생지
평안북도 영변
목차
정의
해방 이후 「자유만세」 · 「독립전야」 · 「국민투표」 등의 작품에 관여한 영화인. 영화감독 · 친일반민족행위자.
생애 및 활동사항

1919년 평안북도 영변에서 출생했다. 1924년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지만 이듬해 1925년 중퇴했다. 이해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운전 조수생활을 하며 교토의 영화촬영소에 입사하려고 했지만, 입사시험 실패로 귀국했다. 귀국 후 자동차강습소에서 일하다가 1935년 신의주에서 고려영화(주)를 설립했다. 1937년 3월 상경하여 안석영 감독의 영화 「심청」 제작에서 녹음 조수로 작업을 함께 했다. 1938년 4월 윤봉춘의 「도생록」과 1939년 박기채의 「무정」 제작에 녹음기사로 참여했으며, 1939년 「국경」으로 감독에 데뷔했다. 이후 「수업료」·「집 없는 천사」·「태양의 아이들」·「사랑과 맹세」 등의 영화를 감독했다.

1941년 황민화를 선전한 영화 「집없는 천사」를 연출하고, 1943년 일제의 국경경비대를 미화하고, 내선일체를 선전한 영화인 일본 도호영화사(東寶映畫社)가 제작한 「망루의 결사대」에서 연출 보좌로 참여했으며, 1945년 지원병 모집을 주제로 한 「사랑과 맹세」를 감독하는 등, 일제에 협력하여 친일영화를 제작했다. 해방 후에는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조선영화건설본부에 참여했으며, 대한문화인협회 준비위원, 광복영화로 「자유만세」를 비롯하여 「죄 없는 죄인」·「독립전야」·「국민투표」 등을 감독했다.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으며,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

최인규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1·13·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8: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129∼146)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참고문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18: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현대문화사, 2009)
『일제말기 한국영화사』(함충범, 국학자료원, 2008)
『한국영화감독사전』(한국영화감독협회, 국학자료원, 2004)
『조선은행회사조합요람』(中村資良, 동아경제시보사, 1937)
『민주신보』(1951.1.1)
『한성일보』(1950.4.25)
『경향신문』(1949.8.15)
『매일신보』(1945.8.18)
『대동아』14-5(1942.7.1)
『동아일보』(1938.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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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성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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