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유 ()

법제·행정
인물
해방 이후 세브란스대학 부속병원장, 보건사회부장관 등을 역임한 의학자. 교육자.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6년(고종 43)
사망 연도
1993년
본관
전주(全州)
목차
정의
해방 이후 세브란스대학 부속병원장, 보건사회부장관 등을 역임한 의학자. 교육자.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아버지는 병현(炳鉉)이며, 어머니는 김승량(金勝良)이다.

생애

1929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37년 일본 경도대학(京都大學)에서 의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33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하여, 1945년 같은 대학 부속병원장·재단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1955∼1956년 보건사회부장관, 1956년 이화여자대학교 부총장, 그 해 한국적십자사 부총재, 1957년대한문교서적주식회사(국정교과서주식회사의 전신) 사장, 1957∼1960년 문교부장관, 1964년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1965∼1972년 연세대학교 재단이사장, 1966년 이수화학(梨樹化學) 사장, 1972년 이수화학 회장, 1973∼1993년 인덕학원(仁德學園)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활동사항

1957년 문교부장관으로 취임한 그의 교육정책은, 첫째 조국혼과 자유민주정신의 진작, 둘째 형식주의교육을 지양하고 실질 제일주의로서 교육의 질적 향상 도모, 셋째 의무교육과 과학·기술 교육의 적극적인 추진, 넷째 민족문화 발달의 촉진, 다섯째 사도 쇄신으로 도의교육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그의 도의교육 강화방침에 따라 당시 문교부는 1958학년도부터 초등학교에서 인격의 터전을 닦아 주고, 중학교에서는 도의적인 심성 함양과 실천력을 길러 주도록 했으며, 고등학교에서는 국가 공동생활체제 내에서 완전한 국민생활을 할 수 있는 인격을 완성하는 데 노력하도록 하였다.

또, 1957년도부터 도의교과서를 국정으로 한 데 이어, 1958년도에는 초등학교 도의교과서 교사용까지 출판하였다. 또한, 그의 과학·기술 교육의 진흥방침에 따라 당시 문교부는 ‘실업기술교육5개년계획’을 1958년(제1년도)부터 실시하였고, 그 해 2월에는 ‘실업교육진흥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밖에도 ① 실과의 충실화, ② 과학·기술 교육을 위한 시설의 확충, ③ 과학·기술 교육자의 재훈련과 확보, ④ 과학·기술 진흥을 위한 법제의 확립, ⑤ 과학관 재건계획의 추진, ⑥ 자연과학계 대학의 충실, ⑦ 과학전시회의 개최, ⑧ 자연과학계 교환교수 계획의 적극 추진, ⑨ 과학 진흥을 위한 국민계몽 등에도 노력하였다.

또한 모든 교육활동이 조국혼에 입각해야 할 것을 강조하고, 교육행정에는 실질 제일주의로 임하면서 의무교육을 적극 추진하고 사도를 쇄신하였다. 그리고 교육세법의 제정 실시, 중고등학교 시설 기준을 설정하였다.

참고문헌

『문교개관』(문교부, 1958)
『한국교육운동사』 Ⅱ(손인수, 문음사, 1987)
『한국교육운동사』 Ⅰ(손인수, 문음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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