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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주전투(忠州戰鬪)

    고려시대사사건

     1231년(고종 18) 몽고병과 충주 노군(奴軍)사이에 벌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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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목명충주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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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31년(고종 18) 몽고병과 충주 노군(奴軍)사이에 벌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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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역닫기영역열기내용
    몽고는 1225년 사신인 저고여(著古與)가 압록강 너머에서 피살당한 것을 구실로 1231년 제1차로 고려에 침입함으로써 이후 약 30년에 걸친 전쟁이 시작되었다.
    정부는 1232년강화로 천도하고 항전과 강화교섭의 양면작전으로 전투에 임하였기 때문에 전쟁수행에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따라서, 전투는 주로 본토의 농민과 천민이 하였으며, 심지어는 초적들까지 참가하고 있었다.
    충주가 몽고군에게 처음 공격을 받은 것은 1231년 12월(제1차 침입)이었다. 이 때, 살리타(撒禮塔)는 개경을 포위하고 휘하의 별동부대로 하여금 양주ㆍ광주ㆍ충주ㆍ청주 등 여러 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당시 충주에는 부사 우종주(于宗柱)가 양반별초(兩班別抄)를, 판관 유홍익(庾洪翼)이 노군과 잡류별초(雜類別抄)를 거느리고 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몽고병이 공격하자 우종주ㆍ유홍익과 양반별초는 성을 버리고 달아났고, 노군과 잡류별초만이 남아 몽고군을 물리쳤다.
    도망갔던 지휘관과 양반들은 몽고군이 물러간 뒤 돌아와 적이 약탈하여 간 은그릇 등의 물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노군을 죽이려 하였으므로 노군들이 서로 “몽고군사가 이르면 모두 달아나 숨어버리고 성을 지키지 않다가 이제는 어찌 몽고군사가 약탈하여 간 것까지 우리에게 죄를 돌리느냐.”고 하면서 난을 일으켰다.
    이에 조정에서는 안무별감(安撫別監) 김공정(金公鼎)을 보내 노군들을 진무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13세기 몽고의 침략에 대한 호서지방민의 항전」 ( 윤용혁 ,『호서문화연구(湖西文化硏究)』4,1984)

    • 「충주노군(忠州奴軍)의 난(亂)과 대몽항쟁(對蒙抗戰)」 ( 손홍렬 ,『호서문화연구(湖西文化硏究)』1,1981)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손홍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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