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가 금나라에 사대정책을 펴자 이를 반대하던 묘청(妙淸)이 1135년(인종 13) 분사(分司) 시랑(分司) 조광 등과 함께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묘청의 정치세력은 지역적으로는 서경에 기반하고, 대외적으로는 반금정책(反金政策)에 기반하여 왕을 황제라고 칭하고 연호를 사용하자는 칭제건원(稱帝建元)을 주장하였다.
이자겸의 난으로 개경이 불타고 정치적 혼돈이 확산되면서 인종은 서경으로 자주 행차하면서 고려의 정치 개혁을 모색하였다. 이는 서경 세력의 정치적 입지에 동력을 가져다 주는 것이기도 하였지만, 동시에 위기감을 갖게 된 개경 귀족 세력이 서경 세력을 견제하면서 정치적 갈등이 오히려 심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김부식 등 개경의 귀족 세력이 서경 세력을 강력히 견제하자 인종도 점차 서경 세력을 멀리하였다. 왕권과 연계하여 정치적 주도권을 확보하고자 하였던 서경 세력은 자신들의 의도가 좌절에 직면하자 1135년(인종 13) 1월, 묘청은 난을 일으키고 직접 개혁에 도전한 것이다.
난이 일어나자 개경에 있던 정지상, 김안, 백수한 등이 제거되고, 김부식이 이끄는 정예 1만 군이 파견되어 이듬해인 1136년(인종 14)에 서경을 함락하고 묘청을 처단하였다. 서경에서 난을 일으킬 때 묘청이 칭제건원한 것에 대해서는 『고려사』 묘청전에, “국호를 ‘대위(大爲)’라 하고 연호는 ‘ 천개(天開)’로 정하였으며, 그 군대를 ‘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하였다”고 밝혀져 있다.
국가의 자주성 회복이 최고의 중요성을 갖는 식민지 시대에 묘청의 이 같은 정치적 행동은 특히 높게 평가되었다. 묘청 등이 가지고 있던 시대정신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