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남시 ()

하남 시가지
하남 시가지
인문지리
지명
경기도 중앙, 서울의 동단에 위치한 시.
정의
경기도 중앙, 서울의 동단에 위치한 시.
개관

동쪽은 한강을 건너 남양주시와 광주시, 서쪽은 서울특별시, 남쪽은 성남시·광주시, 북쪽은 구리시와 접하고 있다. 동경 121°08′∼127°17′, 북위 37°28′∼37°34′에 위치한다. 면적 93.07㎢, 인구 23만 2,487명(2017년 기준)이다. 행정구역은 13개 행정동(24개 법정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청은 경기도 하남시 신장동에 있다.

자연환경

남남서 방향으로 지나던 광주산맥이 이 지역에서 해체되고 곳곳에 구릉성의 야산이 전개되고 있다. 동쪽에는 검단산(黔丹山, 620m), 남쪽에는 청량산(淸凉山, 480m), 중앙에는 객산(301m)이 솟아 있다. 그리고 이들 산지와 연결되는 구릉지가 연속해 나타나고 있으나, 대부분은 고도가 100m 내외의 저산성 산지를 이룬다.

이들 산지 사이를 망월천(望月川)·초이천·산곡천(山谷川)·덕풍천(德豊川) 등의 소하천들이 북류하여 한강에 합류하고 있다. 이들 하천은 낮은 지대를 흐르고 한강의 하상은 낮지 않아 홍수시 한강물이 역류하여 주변 지역에 범람원이 넓게 나타난다.

북부지역에서는 한강이 북서류하다가 미사동 부근에서 남서류함에 따라 신장동 일대에는 범람원이 계속 늘어나고 있으며 미사동 일대의 하중도도 넓어지고 있다.

지질은 화강편마암이 대부분이고 토양은 적황색토·암쇄토가 구릉지에 나타나며 충적토가 하천변에 나타나고 있다. 연평균기온은 11℃, 1월 평균기온 -4.7℃, 8월 평균기온 25.5℃로, 한서의 차가 30℃를 넘고 있다. 연강수량은 1,256㎜이다

역사

구석기시대의 유물이 채집되었고, 신석기시대 유적으로 널리 알려진 미사동의 선사주거지에서 출토된 빗살무늬토기는 신석기인들이 이 지방을 생활 터전으로 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초기백제나 삼국시대의 토기가 출토되어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를 거쳐 삼국이 정립한 역사시대에도 이 곳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이 지방은 백제의 건국 터전으로 초기백제의 중심 무대였다. 최근에 학술조사로 드러난 춘궁동·초일동·광암동 일원의 이성산성(二聖山城)은 한강변에 위치한 삼국시대의 토성인 서울특별시의 몽촌토성(夢村土城)·삼성동토성·옥수동토성·양진성(楊津城)·아차산성(阿且山城)·풍납동토성·암사동토성과 광주군의 남한산성·구산토성(龜山土城), 미금시의 수석동토성과 방사상으로 연관되어 전략적 요충을 이루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한편, 이성산성의 남쪽에는 춘궁동·하사창동·상사창동의 넓은 평야가 산성을 배후로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백제의 도읍지인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의 위치가 이 곳 춘궁동 일원으로 추정되기도 하였다.

이곳은 삼한시대에는 진국(辰國)의 변경지역이었으나 한강유역으로 남하하는 유이민을 용납하기에는 가장 적당한 터전이었으므로 진한이 이 지방을 중심으로 부족국가를 형성하여 200여 년을 지내다 백제의 도읍지가 되었던 것이다.

백제 시조인 온조(溫祚)는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으로부터 토지가 비옥한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후 백제는 이 지방을 근거로 고구려·신라와 삼국 쟁패의 첨예한 각축을 벌였다. 371년(근초고왕 26)에는 백제가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이곳에 있던 도읍을 남평양(南平壤 : 지금의 서울)으로 옮겼으나, 475년(문주왕 1)에는 고구려 장수왕의 공세에 밀려 이 지방을 상실하였다. 때문에 이로부터 고구려의 영토가 되어 한산군(漢山郡)으로 불렸다.

551년(성왕 29)에는 백제 성왕과 신라 진흥왕이 연합, 한강유역을 고구려로부터 탈환하여 이 지방은 다시 백제의 영토가 되었다. 그러나 다음 해 곧 신라가 이 지방을 차지하고 광주고읍인 하남시 일원에 신흥주(新興州)를 설치하여 김무력(金武力)을 군주(軍主)로 삼았다.

이러한 사실은 1990년 이성산성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목간(木簡)에 기록된 “戊辰年正月十二日朋南漢城道使須城道使村主前南漢城……(무진년정월12일붕남한성도사수성도사촌주전남한성……)”이라는 명문(銘文)에도 ‘南漢城’이라는 구절이 보여 확인되고 있다.

이 명문의 무진년은 608년(신라 진평왕 30)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최소한 신라가 이 시기 이전에 한강유역을 점령했음을 알려준다. 또, 664년(문무왕 4) 신라는 남한산성을 한산주(漢山州)로 개칭했으며, 670년남한산주(南漢山州)로 고쳤다가 757년(경덕왕 16) 다시 한주(漢州)로 개칭하였다.

940년(태조 23)광주(廣州)로 개칭했으며, 983년(성종 2) 전국에 12목을 설치할 때 그 가운데 하나로서 광주목으로 승격되고 목사(牧使)를 두었다. 995년에 12목 대신 12주 절도사(節度使)가 설치되면서 다시 광주로 환원되고, 봉국군(奉國郡)이라 했으며, 관내도(關內道)에 속하였다.

1012년(현종 3) 절도사를 폐지하고 안무사(安撫使)를 두었다가 1018년에 다시 광주목으로 개편하고 목사를 파견하였다. 고려 중기 이후 5도·양계(兩界)의 지방제도가 정비되면서 양광도(楊廣道)에 속하였다.

조선 초에 한양이 도읍지가 됨에 따라 1395년(태조 4)양광도의 수원부(水原府) 이하 7개 군·현과 더불어 경기좌도(京畿左道)에 편입되었다. 1456년(세조 2) 좌보(左輔)가 되어 우보(右輔) 원주, 전보(前輔) 수원, 후보(後輔) 양주와 더불어 수도 방위의 요충지로 되었다.

1505년(연산군 11)에 혁파되었다가 1511년(중종 6) 복구하여 목사를 두었다. 1566년(명종 21)에 방어사(防禦使)를 겸하고, 1573년(선조 6)에는 토포사(討捕使)를 겸했으며, 1577년 부윤(府尹)으로 승격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수어부사(守禦副使)를 겸하고 1623년(인조 1) 유수겸수어사(留守兼守禦使)로 승격되었다가 1630년 부윤으로 복구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청군과 대치하여 남한산성에서 45일간 항전할 때 보부상들의 희생적인 보급로로 이용되는 등 국난 극복의 현장이 되기도 하였다. 1750년(영조 26) 다시 유수겸방어사로 승격되었다가 1759년 부윤으로 환원되었으며, 1795년(정조 19)에 다시 유수겸방어사로 되는 등 변화를 겪었다.

1895년(고종 32)광주군으로 개편되었으며, 이 때 지금의 하남시 지역은 광주군 동부면(東部面)으로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광주군청이 남한산성에서 경안읍(慶安邑)으로 이전되었는데, 이 때 동부면의 행정구역이 신장리·미사리·풍산리 등 12개 이로 구획되어 광주군에 속하였다.

1989년광주군 동부읍·서부면과 중부면 상산곡리가 병합하여 하남시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1994년 시청사를 덕풍동에서 신장동으로 이전하였다.

한강 연안의 비옥한 터전과 선사주거지인 미사동 등을 외곽 경계로 곳곳에 고대 문화의 유적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수도권 순환도로인 판교∼구리간, 신갈∼반월간의 고속도로가 춘궁동을 관통하고 있어 수도권 신흥도시로 급성장하고 있다.

유물·유적

선동·미사동·춘궁동 등에 신석기문화 유적지가 있고, 미사동·덕풍동 등에 청동기문화 유적지가 있다. 미사동에서는 주거지와 빗살무늬토기가 나왔으며, 덕풍동에서는 돌도끼·숫돌·대팻날 등이 출토되었다.

미사동의 미사리 유적(사적, 1979년 지정)은 신석기시대층·청동기시대층과 삼국시대의 초기층이 상하관계로 구분되어 있다. 신석기시대층에서는 다량의 빗살무늬토기·어망추·화살촉·돌도끼 등의 생활도구와 탄화된 도토리가 출토되었고, 청동기시대층에서는 무문토기와 함께 당시의 집터가 확인되었다.

불교유적으로는 춘궁동에 하남 동사지(사적, 1991년 지정)·하남 동사지 오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하남 동사지 삼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 교산동에 교산동 마애약사여래좌상(보물, 1989년 지정), 그리고 광주향교(경기도문화재자료, 1983년 지정)가 있다. 한편, 1993년 경기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조선장(造船匠) 기능보유자가 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교육·문화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는 광주향교가 있었다. 교산동에 있는 광주향교는 본래 고읍(古邑) 서쪽 2리쯤 되는 곳에 있었으나 1703년(숙종 29)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그 밖에 상산곡동에 사충서원(四忠書院)이 있는데, 이는 1726년(영조 2)에 노량진에 세워졌던 것으로 그 뒤 보광동으로 이전했다가 6·25사변 때 파괴되어 1968년에 현재의 위치에 중건하였다.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1934년에 동부소학교, 1936년에 서부소학교가 설립되었다. 그 뒤 점차 많은 학교들이 증가하여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6개교, 중학교 8개교, 고등학교 7개교, 특수학교 1개교가 있다.

민속

이 시의 중요한 민속놀이로는 농기뺏기놀이를 들 수 있다. 이 놀이는 주로 한강 이남지방에서 성행했는데, 이곳에서는 신장동의 농기뺏기놀이가 특히 유명하다. 예로부터 농촌에는 농악이 성행했고, 이를 상징하는 농기가 있었다. 그리고 이 기에는 ‘農者天下之大本(농자천하지대본)’이라고 쓴 기폭과 함께 꿩의 꽁지깃을 묶어 깃대 꼭대기에 꽂아놓았다.

각 마을에서는 이 깃대를 신성시하고 장목을 소중히 하게 마련이었다. 농사일이 끝날 무렵, 신장동 장례(長禮)마을에서는 이웃 천현동 샘재마을과 함께 농기뺏기놀이가 펼쳐진다. 이들 마을 사이에는 시내가 흐르고 있어 시냇가 넓은 곳에서 놀이가 벌어지는데, 마을의 남녀노소가 모두 나와서 열띤 응원을 한다.

농악대가 마주보고 서열에 따라 질서있게 서로 절을 하는 데서부터 놀이가 시작되며, 절은 농기를 앞으로 굽히는 것이다. 이 때 기를 덜 굽히면 더 굽히라고 상대방에게 소리치며 기세를 올리고, 굽히는 쪽에서는 더 못 굽힌다고 버틴다.

이 처럼 서로 한참 동안 맞서다가 열기가 고조되면 결국 농기를 빼앗기 시작하는데, 수십 명의 장정들이 달려들어 상대방의 깃대를 쓰러뜨리기 위해 수비와 공격을 하며 절정에 달하다가 급기야는 한쪽 편이 상대의 장목을 뽑음으로써 시합이 끝난다.

지는 편에서 심술궂게 석전(石戰)으로 맞서는 경우도 있지만, 마을노인들이 나와 만류함으로써 석전은 쉽게 가라앉는다. 농악대와 마을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 춤을 추며 흥겹게 놀고 술과 음식을 차려 먹으면서 한때를 즐긴다. 이 놀이는 농사철이 끝나고 피로를 푸는 데도 뜻이 있지만, 동네간의 화목을 도모하고 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목적도 있다.

동제로는 덕풍동 수리골〔鷲谷〕마을의 산신제와 감이동 정림(靜林)마을의 정제(井祭)가 유명하다. 수리골마을의 산신제는 마을 뒷산에 있는 소나무와 오리나무숲을 신체로 하여 매년 정월 초순에 날을 택해 자정에 거행된다. 제물로는 돼지 한마리를 통째로 바치고 조라술을 따로 마련한다. 제의(祭儀) 절차는 엄격한 관례에 따라 이루어진다.

제관은 상제관·축관·집사 등 여섯 명을 제일 1주일 전에 선출하는데, 이들은 제(祭日)일까지 목욕재계하고 근신해야 한다. 산신제가 끝나면 제물과 술과 고기를 나누어 음복하며, 제에 참여하지 못한 집에도 몫을 보내어 인보상조의 정신을 기려나간다.

또한, 정림마을에서는 음력 7월 1일 밤 10시경에 마을 우물에서 정제를 지낸다. 제관은 동네 고령자 중에서 선출하는 것이 보통이며 마을유지들이 함께 거행한다. 제일 전에 우물을 말끔히 청소한 뒤 소 한 마리를 통째로 바치고 정성껏 제를 지낸다.

정제를 안 지내면 흰쥐나 구렁이 같은 것들이 나돌아다녀 불길한 일이 닥친다고 믿어 한해도 거르지 않았다 한다. 이날은 동민 모두가 일손을 놓고 술과 고기로써 하루를 즐기며 친목을 돈독히 한다. 이 밖에도 창우동 작평(鵲坪)마을과 교산동 객산(客山)마을, 그리고 초이동·춘궁동에서도 산신제를 지낸다.

설화·민요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강화도로 피난을 떠날 때였다. 적군의 선봉대가 이미 홍제원(弘濟院)에 도달하고 그 휘하부대가 남하하여 양천강(陽川江)을 건너 피난길을 차단하고 있었다. 이에 왕은 가던 길을 멈추고 할 수없이 남한산성으로 행선지를 바꾸기로 하였다.

임금의 행차가 구리개를 지나 시구문을 빠져나와 한강변에 이르렀는데, 강가 갈대 숲에서 누군가 숨겨둔 조그마한 배 한 척을 발견하여 극히 소수의 인원만이 거룻배에 올라 간신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 어두워지는 길을 걸어서 한참만에 송파(松坡)를 지났으나 갑작스러운 보행으로 왕이 기진맥진하여 신하의 등에 번갈아 업혀 얼마쯤을 갔으나 급기야 눈길에 주저앉고 말았다.

다시 일어나 산길로 들어서자, 마침 건장한 몸집을 한 사람이 지게를 지고 지나가는데, 순박한 이 사람은 왕의 행차인지도 모르는 듯하였다. 신하 한 사람이 자초지종을 말하고 왕을 모셔주기를 원하자, 이 사람은 선뜻 왕을 등에 업고 순식간에 산성 안에 이르러 왕을 내려놓았다.

그는 산성 안에 살며 나무를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서흔남(徐欣男)이라는 사람이었다. 얼마 후 왕이 그를 치하하며 소원을 묻자, 그는 갑작스러운 물음에 별로 소원이 없는 듯 멍하니 있다가 금빛 찬란한 곤룡포가 마음에 들었던지 왕이 입고 있는 그 옷을 가지고 싶다고 하였다.

신하들은 어이가 없어 무엄한 놈이라고 호통을 쳤으나, 왕은 생명을 구해준 은인에게 무엇인들 못 주겠느냐고 하며 곤룡포를 벗어주었다. 그 뒤 서흔남은 평생을 두고 이 곤룡포를 고이 간직하다가 죽을 때 이 옷과 함께 묻어달라고 유언하였다.

그가 죽은 뒤에 산성 남서쪽 병풍산에 묻어주고, 나라에서는 생전의 공을 찬양하여 별군관이라는 벼슬을 내렸다. 그리고 대소 관원들이 그의 묘 앞을 지나갈 때는 왕의 곤룡포를 존중하여 반드시 말에서 내려 절을 하고 지나갔다고 한다.

이 고장에 전해지는 민요는 다른 지방의 노동요인 남요(男謠)에 비해 부요(婦謠)와 동요만이 전래되고 있다. 이 중 「사촌형님」은 부녀자의 애환이 담긴 것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다.

“…형님 형님 사촌형님/반갑기는 하오마는/코아래 구녕이 무섭소/쌀 한되만 재쳤으면/형도 먹고 나도 먹고/구정물은 소가 먹고/누른밥은 개가 먹고…”라는 내용이며, 「서당앞에 비자낭근」은 “…당앞에 비자낭근/선비제위 흔들었네/냇가의 버들잎은/물살제위 흔들었네/칠팔월의 슨나락은/모끼제위 흔들었네….”

이 밖에 동요로 “…하날때 두날때 사마종날때 윤날거지 팔대장군 고두레뽕…”이라는 숨바꼭질노래가 전해져오고 있다.

산업·교통

산지가 전체의 53.1%를 차지하며 경지 16.5%, 하천 11.0%, 대지 4.2%, 도로 4.3%이다. 충적지가 100m 이하의 저산성 산지를 이루고 있어 농사짓기에 편리한 지역의 하나이다. 이전엔 논농사가 많았으나, 도시화·공업화로 경지면적이 계속 줄어들고 있다. 경지 중 논 62㏊, 밭 863㏊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 이외에 상추·무·배추·호박·오이·고추·파, 특용작물로 들깨·참깨, 과실류로 포도가 생산된다. 서울 근교에 입지하여 대도시를 상대로 하는 근교농업이 발달하고 있으며 축산업도 발달하였다. 그리고 산지가 많아 임산자원으로 밤·대추·호두·은행 등이 생산되고 있다.

농가 인구는 전체 인구의 7.1%이고 제조업의 인구는 전체 인구의 2.5%이다. 과거에는 장석과 활석이 생산되었으나, 노동력 부족으로 폐광 되었다. 주요 제조업으로는 비금속공업·조립금속공업·섬유공업이 발달하고 있다. 서울에 인접한 경공업 도시이면서 전원도시로 발전하고 있다.

상업 시설로 쇼핑센터 1곳과 일반시장이 2개 있으나 주민의 다수가 상품 구매를 위해 서울이나 성남시로 이동하고 있어 상권이 형성되지 못하고 있다. 교통은 중부고속도로가 시의 중심부를 서북∼동남방향으로 지나고 국도 47호선이 중부고속도로와 나란히 지나고 있다.

서울외곽순환도로가 서남∼동북진하여 중부고속도로와 시중심부에서 만나 북진하여 구리시로 들어간다. 외부 지역과의 교류는 비교적 쉬우나, 시내 도로는 불완전하고 교통 체증이 심하다.

관광

서울과 인접한 이 지역은 한강유역의 충적지와 침식을 받아 이루어진 100m 이하의 저산성 산지가 발달, 구릉성 지형을 이루고 있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한강유역의 충적평야와 구릉성 저지대에서는 서울을 대상으로 한 근교농업과 과수재배가 활발하여 주말 관광농장이 발달하였다.

그러나 서울의 거대도시 팽창으로 농경지는 소멸되고 주거지로 변모되어 서울 주변의 신생 위성도시 중 인구 증가율이 가장 높은 지역이 되었다.

특히 이곳은 우리 조상들의 삶의 터전으로 신석기·청동기·초기철기·원삼국·백제시대 사람들이 찬란한 문화를 형성했던 지역이다. 이와 같이 한 장소에서 각기 다른 시대의 삶의 유적층을 발견하기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이 지역은 백제 초기에는 한강변에 위치한 몽촌토성을 비롯한 많은 토성들과 이성산성이 협조 체제를 이루어 백제를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이었으므로 유적발굴이 기대되는 곳이다.

5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선사 유적지가 미사동에서 발굴되었으며, 강가를 따라 생활했던 선사인들의 발자취가 신석기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광범위하게 발견되어 역사유적 관광지로 관심이 높은 지역이다.

특히 이곳의 관광지는 이성산성에서 내려다보는 팔당댐과 한강이 시원스레 보이는 자연 경관이 뛰어나다. 미사동에 있는 선사 유적지는 서울에서 올림픽대로를 따라 팔당방면으로 가다 보면 미사리조정경기장이 나오는데, 바로 그 곳 강 안쪽의 충적지에 발굴되어 있다.

발견된 층위는 모두 7층인데, 이곳에서 발굴된 신석기시대의 움집과 바깥화덕자리, 빗살무늬토기와 돌도끼·돌살촉·어망추 등이 약 5,200년 전의 생활도구로 판명되어 서울 암사동유적과 문화형성층이 동일한 사람들의 것으로 밝혀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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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高麗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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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행정구역요람』(행정자치부,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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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지지』(건설부국립지리원, 1984)
『우리 고장의 문화재총람』(경기도, 1978)
『경기도지』(경기도지편찬위원회, 1957)
하남시(www.ihana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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