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동맹은 창립선언문에서, 중국지역 혁명집단의 총연합체로서, 그 결합의 중심은 종교적·지방적 또는 개인적 중심에 의한 것이 아니며, 한국독립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가졌다고 규정하였다. 이어 일제통치의 타도와 한국의 독립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선결과제가 항일전선의 통일임을 전제하고, 통일동맹이 구심적인 역할을 할 것임을 자임하였다. 참여범위도 중국 관내에 국한하지 않고 국내·미주·하와이·노령지역의 독립운동세력을 동맹대상으로 하였다. 예를 들어 1933년 김규식은 통일동맹의 자금모집을 위해 남양지방을 경유해 미국으로 건너갔는데, 이때 활동자금으로 5,000원을 모금했고, 미국지역의 단체들 대부분을 가맹시켰다.
강령은 규약 제2조에 잘 나타나 있다. 첫째, 우리는 혁명의 방법으로써 한국의 독립을 완성하고자 한다. 둘째, 우리는 혁명역량의 집중과 지도와 통일로써 대일전선의 확대·강화를 기한다. 셋째, 우리는 필요한 우군(友軍)과 연결을 기한다.
이를 위해 통일동맹은 한중 연대활동을 강화하고, 단일대당의 창당을 시도했다. 우선 중국인 항일단체인 동북의용군후원회(東北義勇軍後援會)와 제휴하여 중한민중대동맹(中韓民衆大同盟)을 조직하여 군무부장에 유춘교(柳春郊), 조직선전부장에 박건웅이 활약했다.
한편 1935년 3월 1일 난징[南京]에서 동맹대표대회 및 한국혁명각단체대표대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각 단체 대표 12명은 “본 동맹의 목표인 조선혁명역량을 총집중하고, 참으로 대일전선의 통일·확대강화를 꾀하기 위해서는 현재와 같은 각 단체의 제휴만으로는 도저히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였다. 이에 가맹단체들은 각 혁명단체를 전부 해소하고 ‘혁명동지’ 즉 단원을 통일동맹에 합류시켜 ‘단일대동맹’을 조직할 것을 논의하고, 이러한 뜻을 각 단체에 통고, 단일대동맹의 결성을 촉구하기로 하였다.
1935년 6월 20일 난징에서는 ‘단일대동맹’의 결성을 논의하기 위해 통일동맹 제3차대회가 열렸다.
의열단·신한독립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대한독립당·뉴욕 한인교민단·미주 국민회·하와이 국민회·하와이 혁명동지회 등 각 단체의 대표들은 대동단체로서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결성하기로 결의하였다. 7월 4일 단일대당 창립대표대회를 열고 7월 5일 민족혁명당의 결당식을 거행하였다. 이에 따라 통일동맹은 민족혁명당으로 발전적으로 해체하였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에는 처음부터 상해 임시정부의 김구(金九)계열이 참여하지 않았고, 민족혁명당이 결성될 때에도 김구 일파는 신당조직에 반대했다는 점이다. 당시 본 동맹과 민족혁명당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김원봉의 의열단이 좌파적 색채가 농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구계열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단체가 통일동맹과 민족혁명당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김구계열은 독립운동계나 임시정부 내에서 소수파가 되었고,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전선상에서의 비중은 그만큼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