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휘지(徽之), 호는 퇴암(退菴). 좌의정 허침(許琛)의 5대손이며, 지중추부사 허진(許晉)에게 입양되었다.
1607년(선조 40)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가 1616년(광해군 8) 양천현령이 되었다가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과 함께 다시 등용되어 안성군수·예천군수·이천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1635년(인조 13) 동지중추부사에 선임되었다.
이듬해 다시 경주부윤이 되고, 이어 광주목사(廣州牧使)가 되어서는 호란이 있을 것을 예측하고 남한(南漢)의 성보(城堡)를 증축하고 군량미를 확보하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같은해 겨울에 그가 예측한 대로 청나라 군사가 급히 쳐들어와서 왕과 신하들이 남한산성에서 포위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선견지명 덕으로 40일 가량 지나도 비축된 군량미가 남은 것이 알려져 왕으로부터 칭찬을 듣고 광주부윤에 승진되었다. 1638년 지중추부사를 거쳐, 형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어 한성부판윤·강화유수·공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80세가 되는 1647년에는 판중추부사가 되었으며, 1649년 효종의 즉위와 함께 다시 공조판서가 되었다. 성품이 공손하면서 근면하였고, 자신이 높은 벼슬에 있으면서도 권세를 부리지 않았으며 항상 검소하였다 한다. 시호는 익정(翼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