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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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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문신 박종겸이 사도세자의 피화전말과 추존 및 시파 · 벽파의 대립 등에 관하여 기술한 역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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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후기 문신 박종겸이 사도세자의 피화전말과 추존 및 시파 · 벽파의 대립 등에 관하여 기술한 역사서.
내용

4권 2책. 필사본. ‘현(玄)’자는 ‘임(壬)’과, ‘고(皐)’자는 ‘오(午)’와 뜻이 통하므로 ‘현고기’는 임오년기사(壬午年記事)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임오년은 1762년(영조 38)으로, 사도세자의 대리청정을 폐해 폐서인(廢庶人: 일반 백성으로 폐함.)하고, 영조가 친정으로 복귀한 뒤 사도세자를 뒤주 속에 가둬 굶어죽게 한 사건이 있었던 해이다.

이 책은 원편 2권 1책과 속편 2권 1책으로 되어 있다. 원편은 박종겸(朴宗謙)이 펴냈고 속편은 후대인이 덧붙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원편은 본래 저자 미상이었으나 같은 내용의 『현구기사(玄駒記事)』에 박종겸이 펴낸 것으로 밝혀져 그의 저서임을 알 수 있다.

내용은 진종(眞宗: 영조의 맏아들 縡, 당시 세자, 뒤에 왕으로 추존)의 죽음과 사도세자의 출생, 궁중의 암투와 사도세자의 행각, 시파·벽파의 싸움, 당시의 정세, 세손의 대리청정, 영조의 죽음 직전 전위(傳位: 왕위를 물려줌.)의 전교(傳敎: 왕의 명령 또는 의사전달) 등을 연대순으로 기술하고 있다.

문제의 발단은 경종이 즉위한 뒤 생모 희빈 장씨(禧嬪張氏)의 특사 문제에서부터 야기되었다. 노론(老論)의 중심 인물인 민진강(閔鎭綱) 등이 건저 문제(建儲問題: 왕을 계승할 인물로 왕세자를 세우는 문제)를 제기해 경종의 이복 동생 연잉군(延礽君: 뒤의 영조)을 왕세제로 책봉해 대리청정을 시키자는 주장과 이를 반대하는 소론(少論) 이광좌(李光佐)와의 대립이 격화된다. 이 때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 일파의 역모 고변 사건으로 노론 4대신의 피화 사건이 있게 된다.

한편, 사도세자는 1761년 평안도관찰사 정휘량(鄭翬良)의 간교에 빠져 부하 50∼60명을 거느리고 평양에 다녀왔다. 이를 주선하고 유인한 것은 아첨을 잘하는 간사한 무리들이었다. 이를 뒤늦게 안 영조가 크게 진노해 마침내 세자를 죽이게 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사도세자가 1762년 5월 21일에 죽었다는 것도 밝히고 있다.

또한, 세자는 출생한 지 1년 만에 세자로 책봉되고 동궁 시절에 신임사화 때의 사실을 알고 노론에게 복수하겠다고 공언해 노론의 경계 대상이 되었다. 그리하여 1749년 대리청정을 건의해 세자의 마음을 돌리려 했으나 노론에 대한 복수심이 조금도 풀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영조의 계비와 후궁 숙의 문씨(淑儀文氏) 등이 세자를 모함하고 무고하고, 김한구(金漢耉)·홍계희(洪啓禧)·윤급(尹汲) 등이 윤급의 종 나경언(羅景彦)을 시켜 세자의 대역(大逆)을 고변하는 10개조의 의견을 올렸으나 나경언이 도리어 처형되었다.

그러나 숙의 문씨가 조카 문성국(文聖國)을 중으로 가장시켜 궁궐을 출입하게 하면서 간계를 꾸며 마침내 세자를 죽이게 된 사실도 소상히 나와 있다.

아울러 속편에는 영조의 죽음과 정조의 즉위, 정조의 처분들, 김구주(金龜柱) 등의 유배, 현륭원(顯隆園)의 건축과 정조의 배행(拜行: 제례를 하러 감.) 및 영남 유생 1만 명의 추숭상소(追崇上疏: 사후에 왕호를 올리자는 상소) 등이 수록되어 있다.

끝에는 1800년 정조가 연신(筵臣: 경연의 신하)에게 부탁한 오회연설(五晦筵說)과 1855년(철종 6) 사도세자의 추숭을 청하는 영남 유생 만인소, 1899년 사도세자의 묘호(廟號)를 장조(莊祖)로 추숭한 사실 등이 덧붙어 있다. 그리고 시벽본말(時僻本末)이라 하여 시파·벽파의 분열과 계보를 간단히 덧붙여 기록하였다. 이 책은 사도세자 또는 시파·벽파에 관한 사실을 규명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규장각 도서에 있다.

참고문헌

『조선당쟁관계자료집』 12(이이화 편, 여강출판사, 1985)
『(국역)현고기』(장유승, 수원화성박물관, 2015)
『사도세자의 죽음과 그 후의 기억 : 『현고기』 번역과 주해』(김용흠,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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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강주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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