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군 ()

현대사
사건
대한민국 국군이 군내부에 침투한 좌익 동조자를 축출하기 위해 실시한 군부숙청.
정의
대한민국 국군이 군내부에 침투한 좌익 동조자를 축출하기 위해 실시한 군부숙청.
역사적 배경

대한민국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는 창립 초기부터 모집 기준이 엄격하지 않았으며, 신원조사를 실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좌익의 침투가 용이했다. 1947년 말부터 국방경비대 증강을 위해 모병이 확대되면서 이러한 경향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남로당원을 비롯한 좌익 성향을 가진 군인들이 군 내에서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경과

숙군은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하기 이전부터 국방경비대 내에서 각 부대내의 좌익을 축출하기 위해 부대단위의 소규모로 시작되었으며, 주로 사병을 대상으로 하였다. 숙군이 군 전체로 확산된 계기는 1948년 6월 18일에 있었던 제주도 주둔 제9연대장 박진경 대령의 암살이었다. 박진경 대령 암살사건 이후 군 입대자에 대한 사상검열이 강화되었으며, 좌익 혐의자에 대한 검거가 군 전체로 확산되었다. 숙군을 주도한 것은 백선엽 중령이 책임자로 있던 육군본부 정보국이었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한 육군 제14연대가 반란을 일으킨 이후 숙군의 규모는 확대되었다. 토벌군 중에서도 반란군에 동조하는 자가 나타나자 군내 좌익에 대한 육군본부 정보국은 광주에 조사반을 파견해 토벌군에 소속된 좌익 혐의자들을 조사해 토벌군 내에 침투한 남로당 계열을 150명 적발했다.

여순사건 이후 숙군은 사병 뿐만 아니라 간부급으로 확대되었다. 여순사건을 계기로 숙군이 확대되자 군내의 좌익세력은 탈영하거나 반란을 일으켜 대항했다. 1948년 11월 3일과 12월 6일, 1949년 1월 30일 등 세 차례에 걸쳐 제6연대의 좌익 동조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국군은 6연대 전체를 대상으로 심사를 실시해 숙군을 실시한 뒤 1949년 4월 15일 제6연대를 해체하고 제22연대로 재편했다.

여순사건을 계기로 확대된 숙군은 1949년 3월경 일단락 되었으며 숙청된 인원은 1,496명에 달했다. 1949년 5월 표무원(表武元) 소령과 강태무(姜太武)이 휘하 대대를 이끌고 월북하자 다시 한번 대규모 숙군이 단행되었다. 숙군은 한국전쟁 직전까지 소규모로 계속되었다. 숙군으로 파면된 일부 장교는 한국전쟁 시기에 복권되어 군에 복귀하였다.

결과

숙군의 결과 국군은 정치적으로 균일한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숙군은 국군 내의 좌익 뿐 아니라 중도성향의 세력까지 제거하였다. 그 결과 한국전쟁시기 국군은 전쟁 초기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내부로부터 와해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었다.

참고문헌

『한국전쟁: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정병준, 돌베개, 2006)
「1945∼50년 한국군의 형성과 성격」(노영기,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08)
집필자
윤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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