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잠수함 침투작전은 1994년부터 본격화되었다. 1994년부터 북한은 잠수함을 간첩 활동에 투입하였고, 1995년 9월 서귀포에 간첩을 침투시키기도 하였다. 1996년 9월 무장공비들이 강릉에 침투한 목적은 1996년 10월 7일 강원도 춘천에서 개최되기로 한 전국체전 개막식에 즈음하여 대통령 김영삼을 암살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북한은 대한민국 동해상에서 전개된 한미군사합동훈련에 대한 불만으로 북한 인민군대표부 담화를 통해 비무장지대와 관련된 규정들을 따르지 않겠다고 선언한 후 판문점에서 무력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또한 북한 내 식량 부족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과 정권 붕괴 가능성, 그리고 남한 내에서의 흡수통일에 대한 논의 등에 대해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군사적 행동을 통하여 위기를 타개하려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 공작원들은 침투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1996년 9월 13일 원산항에서 출항하여 1996년 9월 15일 19시경 강릉시 강동면 안인진리 앞바다에 도착, 공작원을 상륙시켰다. 다음날 20시 30분경 전날 침투시킨 공작원을 복귀시키기 위해 정선(停船)을 시도하다 실패하였다. 9월 17일 2차 정선에 성공하였으나 기관 고장으로 좌초되어 26명의 무장공비들이 내륙으로 침투하였다.
1996년 9월 18일 새벽 1시 30분경 택시 기사가 강릉 해안 20m 해상에서 잠수함을 발견해 파출소에 신고하였다. 대한민국군에서는 2시경 해안 초소에서 잠수함을 확인해 군병력을 투입하였다. 침투한 잠수함은 1986년 북한이 자체적으로 개발한 상어급 잠수함으로 길이 23.5m, 무게 325t, 수상 7노트, 수중 12노트로 항해가 가능하였다.
잠수함 침투 흔적을 확인한 군은 새벽 3시 40분경 최고경계태세인 진돗개 하나를 발령하였고, 4시 55분부터 경비함 5척과 P-3CK대잠초계기 1대를 동원하여 수색 작전을 전개하였다. 7시 25분경에 잠수함 내부로 진입, AK소총과 실탄, 체코제 기관총 등을 발견하였다.
잠수함은 9월 22일 동해 해군부대 항만으로 예인되었다. 당시 대한민국 국방부는 대변인 성명을 통해 북한의 대남 도발이며, 중대한 정전협정 위반 사항이라고 발표하였다.
9월 18일 오후 4시 45분경 청바지를 입고 권총과 실탄을 지닌 승조원 1명(이광수)은 주민 신고로 출동한 강릉경찰서 강동파출소 소속 최우영 경장과 전호구 경장과의 격투 끝에 생포되었고, 민간인 복장을 한 11명은 청학산 정상에서 사체로 발견되었다.
청학산 정상에서 우리 군 수색대에 의해 발견된 11구의 시체는 조사 결과 무장간첩들에 의해 처형당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들 중에는 공화국 2중영웅이자 해상처장으로 무장공비 서열 1위인 김동원 대좌, 해상부처장이자 서열 2위인 김강훈 상좌도 포함되었다.
달아난 인원은 모두 13명으로 이들은 그곳에서 우리 군 수색대와 교전하였다. 1996년 9월 19일 기준 동원된 우리 군은 경찰, 예비군 병력은 4만여 명이었고, 헬리콥터 5대가 하늘에서 합동 수색을 펼쳤다.
수색은 그해 11월 5일까지 49일간 지속되었으며, 연인원 200만 명이 투입되었다. 우리 측은 장교를 포함한 군인 11명, 경찰 1명, 예비군 1명, 민간인 6명 등이 교전 또는 사고로 사망하는 피해를 입었으며, 침투 공비들은 살해된 11명, 생포자 1명, 사살자 13명이었다.
9월 19일 오전 10시 30분경 강동면 언별리 단경골에서 은신 중이던 4명 중 3명 사살, 같은 날 오후 2시 10분경 칠성산 부근에서 3명 사살, 같은 날 오후 4시 10분경 괘일재에서 1명 사살, 9월 28일 성산면 어흘리 왕제산 정상 부근에서 잠수함 부함장 유림 사살, 9월 30일 오후 3시 18분경 칠성산 서쪽에서 간첩 리철진 소위 발견 및 교전 후 사살, 11월 5일 오전 10시 30분경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서 간첩 2명은 사살되었다.
이 과정에서 우리 군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9월 21일 강동면 언별리 칠성산 망기봉 일대에서 도주 간첩 2명과 교전 중 특전사 소속 이병희 중사가 간첩의 조준 사격으로 총상을 입고 사망하였고, 9월 22일 오후 6시 15분경 언별리 칠성산 인근에서 무장 간첩 2명과 교전 중 노도부대 소속 송관종 일병과 화랑부대 소속 강정영 상병이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 도중 사망하였다,
10월 22일 양구와 인제 일대 사격장에서 벌목 중이던 표종옥 일병은 간첩에 의해 질식사하였고, 11월 5일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서 무장간첩 2명과 교전 중 오영안 대령, 강민성 상병 등 4명이 전사하였으며 13명이 부상을 당하는 등 피해를 입었다.
이밖에도 소탕작전 수행 중 오인 사고로 사망자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유일한 생포자이자 생존자인 이광수는 전향 후 해군에 입대하였고, 이후 군무원으로 근무하였다.
1996년 12월 29일 북한은 잠수함 사고에 대한 유감을 표명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하는 공식적인 사과 성명을 발표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다음날 판문점을 통해 24명의 간첩 시신을 북한으로 송환하였다.
잠수함은 조사를 마친 후 지금은 침투 현장인 강릉시 강동면 안인진리 해안에 조성된 통일공원에 전시되어 있다. 한편 인제군 용대리 연화동에는 1996년 11월 5일 전개된 연화동전투를 기념하기 위한 안보공원과 전투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북한의 잠수함 침투사건 등은 당시 북한의 상황에서 한반도의 긴장을 조성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김정일로의 권력 교체기에 있어서 대내적으로 주민들의 사상적 이완을 방지하고 결속력을 다지기 위한 측면, 북한군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전환 등을 통한 내부 결속력을 다지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또 대외적으로 미 · 북 제네바 합의 이행과 미사일 협상 등에서 미국을 압박하기 위한 측면도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한편 국내에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해안 지역에 대한 경계 태세 미비에 대한 비판이 있었기에 우리 육군의 보병 분대 편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변경하였다.
한편 1990년대 초반 남북 관계는 남북체육회담 개최를 통한 남북 단일팀 구성을 합의하였고, 그로 인해 탁구와 축구 종목에서는 남북단일팀을 구성하여 국제대회에 출전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90년 9월부터 1992년 9월까지 여덟 차례에 걸친 남북고위급회담을 통한 남북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가 채택되어 화해와 협력의 분위기가 조성되던 시기였다.
그러나 강릉지역무장공비침투사건으로 말미암아 남북 간의 화해와 협력의 분위기는 좌절되었으며, 북한의 야욕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