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 부산시 연제구 연산동 출생으로, 동래동명학교에서 수학하던 중 교사 김병규의 교육에 크게 감화를 받고, 3학년 때 만주 단동현[安東縣]으로 갔다. 상해로 건너가 독립운동가들을 돕다가 귀국해 1919년 3·1운동 후 백산상회의 안희제(安熙濟)가 중심이 되어 1919년 11월 설립한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의 외국 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1920년 일본 도쿄세이소쿠영어학교[東京正則英語學校]에서 2학년 과정을 수료한 후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東方勞力者共産大學)에 입학해 수학했다.
1923년 1월부터 5월까지 상해 국민대표회에 경남기성회(慶南期成會) 대표로 참석해 노동분과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국민대표회에서 임시정부를 확대 개조하려는 안창호(安昌浩) 계열의 개조파(改造派) 간부로 활동했다.
국민대표회의가 쇠퇴하자, 상해에서 보천교청년회(普天敎靑年會) 대표 강홍렬(姜弘烈) 등 개조파 지지자들과 함께 의열단(義烈團)에 입단해 무장투쟁을 전개하고자 했다. 같은 해 6월말 의열단 총회에서 일제의 중요기관 폭파 및 요인 암살 등의 거사를 대대적으로 실행하기 위해 필요한 군자금 모집을 결의했다. 이에 따라 그는 구여순(具汝淳), 강홍렬, 김정현(金禎顯), 오세덕(吳世悳), 배치문(裵致文)과 함께 군자금 모집요원으로 국내에 밀파되었다.
국내에서 활동을 전개하다가 1923년 12월 29일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이 사건이 제2차 의열단 사건이다. 1924년 2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다이쇼[大正] 8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언도받아 만기 복역했으며, 1930년 4월 ‘후계공산당사건’으로 일본 오사카에서 피검되어 서울로 호송되었다. 해방 때까지 일본경찰의 요시찰 대상자였다.
해방 후 1948년 5월 실시한 제헌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산 갑구에 조선민족청년단 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1948년 6월 무소속구락부에 가담해 연락위원을 맡았으며, 그해 6월 국회 산업노동위원회 소속으로 활동했다.
제헌 과정에서 근로자의 이익을 적극 대변했다.
국회 내에서 남북통일을 목표로 결성된 연우회(硏友會)가 1948년 9월 이정회(以正會)로 개칭되자 기획부 전임위원으로 위촉되었다.
1948년 10월 18일 정부 수립 후 초대 경상남도 도지사에 임명되며 의원직을 사임했다. 불과 5개월 남짓한 제헌국회의원 활동기간 중 독자적인 의정 발언횟수가 무려 62회나 되었다.
도지사로 재임하던 1949년 3월 경상남도 임시 비상사태 대책위원회 위원장으로 여순사건 작전 비용, 상해군경 및 이재민 구호금을 조달하기 위한 회의를 개최해 금 1만원을 내는 등 솔선수범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치안문제를 책임지라며 사퇴를 종용했고, ‘거창·진주사건’이 발생하자 1949년 11월 14일 사임했다.
1950년 부산극장을 운영하였으나, 1972년 제헌동지회 53명이 10월 유신을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할 때 동참했으며, 1973년 11월 11일 사망했다. 사망 후 자녀들은 장례식에 대한 허례 낭비를 생략하고 20만원을 인재양성에 써달라며 원불교 육영부에 장학금으로 기탁했다.
1995년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