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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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산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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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인물
조선 후기에, 『소산집』 등을 저술한 학자.
이칭
휴문(休文)
소산(小山)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14년(숙종 40)
사망 연도
1789년(정조 13)
본관
한산
출생지
안동
관련 사건
이인좌의 난
정의
조선 후기에, 『소산집』 등을 저술한 학자.
개설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휴문(休文), 호는 소산(小山)이다.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동생으로 밀암(密庵) 이재(李栽)에게 수학하였다. 1728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을 때 부친이 의병을 일으키자, 15세의 나이로 종군하였다. 이황의 학문을 흠모하여 형 이상정의 지도를 받으며 경학과 성리학을 공부하였다. 경술(經術)로 천거되어 동몽교관(童蒙敎官) 등에 제수되었다. 당시 학자에 따라 구구하던 예설(禮說)을 정리하여 안동 지방의 표준 예설이 되게 하였다. 18세기 후반 퇴계학맥을 계승한 유학자로 형 이상정과 함께 북송 때 도학자 정호(程顥)·정이(程頤) 형제에 비유되었다.

생애

아버지는 이태화(李泰和)이고, 어머니는 재령 이씨로 이재(李栽)의 딸이다. 1714년(숙종 40) 3월 9일 출생하였다. 부인은 의성 김씨 김양현(金良鉉)의 딸로 김성일의 6세손이다.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이우(李堣), 차남은 이도(李壔)이며, 딸은 장수훈(張壽勛)에게 시집갔다.

종숙부인 이지화(李志和)의 양자로 출계한 이광정은 어려서부터 단정하고 청결하였으며, 타고난 성품이 남들보다 빼어났다. 7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10세 때 갈라산(葛蘿山)에 올라 시를 지어 원대한 포부를 드러내었다.

1728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안동 지방 유림들이 의병을 일으켰는데, 15세의 나이로 응모를 청하여 종군하였다. 또한 밀암(密庵) 이재(李栽)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였고, 여러 차례 향시에 합격하였지만, 문과 시험에는 합격하지 못하였다.

1748년 생부의 상을 당해 삼년상을 치렀고, 1753년 암행어사가 경술(經術)로 조정에 천거하였다. 41세 때인 1754년 “춘추시대 거백옥(蘧伯玉)은 50세에 49세 때의 잘못을 알았는데, 나는 어찌 50세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하고서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은거하여 도를 구하는 공부를 하였다. 1768년 모친상을 당하여 삼년상을 치렀다.

1783년 정조가 “이상정의 동생 이광정이 독서하고 수신하여 형의 풍도가 있다.”는 요지로 하교하고 온릉참봉(溫陵參奉)에 임명하였다. 1784년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고, 1785년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1789년 7월 25일 대산서당(大山書堂) 만완재(晩翫齋)에서 별세하였으니, 향년 76세였다. 선영이 있는 군위현(軍威縣) 북쪽 모로동(毛老洞) 갑좌(甲坐) 언덕에 장사지냈다. 이후 안동 고산서원(高山書院)에 배향되었다.

활동사항

청소년기에 고문가(古文家)가 되고자 하여 제자백가서를 널리 박람하였는데, 외조부 이재에게 수학한 뒤로 학문을 하는 큰 방도를 전해 듣고 도를 구하려는 지향을 하여 형 이상정과 함께 부지런히 학문을 강마하였다.

공맹(孔孟)의 경서와 정주(程朱)의 글을 외우고 사색하였으며, 박학(博學)·심문(審問)·신사(愼思)·명변(明辨)의 지적탐구는 오로지 독행(篤行)을 위한 것으로 보아 실천을 중시하고, 평상의 도리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하였다. 또한 사(私)를 온갖 병폐와 악행의 근본으로 여겨 이를 타파하는 것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요체를 삼았다.

퇴계학통을 계승한 형 이상정이 별세한 뒤, 원근(遠近)의 학자들이 모두 이광정에게 귀의하여 가르침을 청했는데, 진실하게 노력하여 자신에게 돌이켜 체험하게 하였다.

저서

13권 7책의 『소산집(小山集)』과 『대순전서(大舜全書)』 1책이 있다.

참고문헌

『묵헌선생문집(默軒先生文集)』(이만운, 『한국문집총간』제251책, 한국고전번역원)
『입재선생문집(立齋先生文集)』(정종로, 『한국문집총간』제254책,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경학가사전』(최석기,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1998)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www.people.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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