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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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일생에서 경험하는 중요한 사건과 관련하여 가족을 중심으로 행하는 일련의 의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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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개인의 일생에서 경험하는 중요한 사건과 관련하여 가족을 중심으로 행하는 일련의 의례.
내용

개인은 출생부터 사망에 이르기까지 삶이 진전함에 따라 한 종류의 집단에서 다른 종류의 집단으로 옮겨감으로써 지위가 바뀌거나, 삶의 중요한 사건이 세월이 흐르면서 되풀이 될 때에 흔히 집단으로 일정한 의례를 치르게 된다.

인류학자 반 게넵(Arnold van Gennep,)은 개인의 출생·성년·혼인·사망 같은 삶의 계기들을 통과할 때에 갖는 의식과, 생일·새해 등 역년(歷年)의 계절과 관련하여 삶의 중요한 사건을 확인할 때에 갖는 의식을 통과의례(通過儀禮)라고 부르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그러한 의례를 가족을 중심으로 행하기 때문에 가정의례라고 부르고 있다.

가정의례는 시대와 사회에 따라서 종류가 다르며, 현재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가정의례로서는 혼례·상례·제례 및 회갑연 등이 있다. 반 게넵에 따르면 통과의례는 개인의 삶이 진전함에 따라서 그 이전과 다른 지위로 옮겨갈 때에 새로운 지위에 적응하도록 하기 위하여 발전한 것이라고 한다. 즉, 새로운 지위로 옮겨갈 때에 겪게 되는 생활의 혼란이나 갈등을 완화시켜 새로운 지위집단에 통합하게 하기 위한 방도로서 통과의례가 발전한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반 게넵은 통과의례의 절차를 세 가지로 보고 있다. 즉, 첫째 그 전에 속하였던 집단에서 분리되기 위한 절차, 둘째 그 전의 집단에서 새로운 집단으로 옮겨가기 위한 전이 절차, 셋째 새로운 집단에 통합하기 위한 절차가 그것들이다.

그러나 모든 사회에서, 또 모든 의식에서 그러한 세 가지 절차가 똑같이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분리를 위한 의식절차는 상례에서 가장 잘 발전되고, 통합을 위한 의식절차는 혼례에서 가장 잘 발전된다. 또, 전이를 위한 의식절차는 성년의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통과의례는 개인적으로는, 분리·전이·통합이라는 세 가지 의식절차를 거치게 함으로써 변화된 상황, 즉 새로운 지위집단에 빠르고 순조롭게 적응하도록 촉진, 회복시키기 위해서 발전된 것이며, 사회적으로는, 개인을 그 집단의 규범과 동질화시킴으로서 집단의 규범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예(禮)에 관한 이론과 실제를 논한 중국의 『예기(禮記)』는 의례의 이와 같은 사회적 기능을 잘 설명하고 있다. 『예기(禮記)』에 따르면 혼례는 남녀의 별(別)을 구분하고 상례와 제례는 조상의 은혜를 밝히는 데 그 의의가 있다고 한다. 이것은 혼례가 남녀유별이라는 유교 규범을 유지하며, 또 상례와 제례는 조선숭배(祖先崇拜)라는 유교 규범을 유지하는 것을 기능으로 한다는 것을 뜻한다. 즉, 혼례와 상례 및 제례는 개인이 유교 규범에 따라서 새로운 지위로 옮겨 혼인과 사망 등에 의해 변화된 상황에서 그 집단 성원 서로간의 관계 및 보다 큰 사회체계에서의 개인의 위치와, 또 새로운 지위에 따르는 구실이 무엇인가를 사회적으로 확인시킴으로써 유교의 사회 규범을 지지하도록 하기 위한 의식절차이다.

통과의례는 모든 사회에 존재하지만, 사회 구조 및 문화의 차이에 따라 사회마다 강조되는 의례의 종류나 그 규범 절차가 다르다. 삶의 주기를 어떻게 구분하는가에 따라서 강조하는 의례의 종류가 서로 달라지며, 또 그러한 의례에 부여하는 의미에 따라서 행위양식이 달라지기도 한다.

우리 사회에서도 사회 구조 및 문화의 변천에 따라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가정의례의 종류와 규범 절차가 바뀌고 있다.

고대의 주요한 가정의례로서는 혼인과 사망에 따른 의례에 관해서만 단편적으로 그 면모를 파악할 수 있다. 먼저 혼인의례에 관해서 보면, 진한에서는 혼인을 하는 데 예(禮)로써 하였으며 남녀의 지위와 구실을 구별하였다고 한다.

예(濊)에서는 동성(同姓)끼리는 서로 혼인을 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동옥저(東沃沮)에서는 여자가 10세가 되면 약혼을 하며, 여자를 남자집에 데려와 키워서 처로 삼되, 여자집에 일정한 재물을 주어야 했다고 한다.

고구려에서는 혼인이 정해지면 여자집에 신혼부부가 거처할 서옥(壻屋)을 지어서 거기서 함께 살다가 자식을 낳아서 장성하게 되면 남자집으로 함께 거처를 옮기는 풍속이 있었다. 그때 남자집에서는 여자집에 돼지고기와 술을 보내되 재물은 주지 않았으며, 혹 재물을 받는 일이 있으면 그것을 수치로 여겼다고 한다.

신라에서는 동성의 근친과도 혼인을 하였으며, 혼인의례에는 술과 음식을 쓰되 빈부에 따라서 경중의 차이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백제에서는 혼인의례를 중국과 같이 하였다고 하나 그 구체적인 것은 알 길이 없다. 다만, 동옥저의 약혼제도와 고구려의 서옥제도에서 우리는 혼인에 따른 새로운 사회적 지위와 구실을 확인하거나 새로운 정신적 균형을 회복하는 데 필요한 절차, 즉 전이를 위한 절차를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망에 따른 장례와 상례를 보면, 부여에서는 사람이 죽었을 때에 산 사람을 산 채로 함께 장사지내는 순장(殉葬)을 하였으며, 죽은 사람을 위해서 복(服)을 입는 상기(喪期)를 5개월로 하되, 길수록 좋은 것으로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복상중에는 남녀 모두 흰옷을 입었다고 한다.

예에서는 사람이 병으로 죽었을 때에는 옛날 집을 버리고 새 집을 마련하였다고 하며, 변진에서는 장사를 지낼 때에 큰 새의 털[大鳥羽]을 사용하였는데, 그것은 죽은 사람이 하늘로 날아가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고구려에서는 죽은 사람을 집안에 3년간 염장(殮葬: 염습하여 장사지냄)하였다가 좋은 날을 택하여 장사를 지내되, 장례는 금·은과 재화로써 호화롭게 치렀다고 한다. 또 장례에는 춤과 노래를 곁들이고, 매장이 끝나면 죽은 사람이 생전에 쓰던 의복이나 수레, 말 등을 묘 옆에 놓아두고 장사에 참여한 사람들로 하여금 다투어서 그것들을 가져가게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상기는 부모와 남편은 3년, 형제는 1년으로 했다고 한다.

동옥저에서는 죽은 사람의 시체를 가매장하였다가 뼈만 추려서 큰 목곽(木槨: 나무로 만든 관을 담는 궤) 안에 온 가족의 뼈와 함께 넣고 죽은 사람의 모양을 나무에 새기며, 또 쌀을 넣는 질그릇과 솥을 그 목곽 옆에 두었다고 한다.

읍루(挹婁)에서는 사람이 죽어도 슬퍼하지 않았으며, 그날로 들에 장사를 하되 곽을 쓰지 않고 죽은 사람의 양식으로서 돼지고기를 그 무덤 위에 쌓아두었다고 한다. 백제에서는 부모와 남편이 죽으면 3년간 상복을 입었으며, 그 밖의 친족은 장사가 끝나면 상복을 벗었다고 한다.

신라에서는 장사를 호화롭게 하는 후장(厚葬)을 숭상하고 순사(殉死: 죽은 이를 따라 자살하는 것)의 풍습이 있었으나, 지증왕(500∼513) 때에 그것을 금하고 또 상례에 관한 법을 제정하여 부모와 처자를 위하여 1년간 복상을 하도록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성종 때에 『예의(禮儀)』가 제정되었으며, 의종 때에는 『상정고금례(詳定古今禮)』 50권이 편찬되었다고 한다. 그것들은 중요한 가정의례를 포함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모두 전해지지 않고 있어 내용을 상세하게 알 길이 없다. 당시의 혼인의례에 관한 구체적 내용을 알 길은 없으나 상층에서는 약간의 예물을 서로 주고받았으며, 일반 서민은 술과 쌀만으로 서로 호의를 교환하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사망에 따른 장례에서는 염(殮)을 하되 관(棺)은 쓰지 않았으며, 가난한 사람들은 아무런 장구(葬具)도 없이 시체를 개미나 새가 뜯어먹도록 들판에 버려두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인종(1122~1146) 때에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徐兢)이 지은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의하면 혼인은 그때까지도 유교적인 예를 의미하는 전례(典禮)에 따르지 않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성종(981∼997)대에 국가의 주요제도를 유교적으로 개편한 것으로 보아 가정의례의 유교적 변환도 이 때부터 시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성종 때에는 죽은 사람을 위해서 입은 상복과 상기를 죽은 자와 친족관계에 따라서 정한 중국의 오복제도(五服制度)를 도입하였고, 이를 권장하기 위해서 관리들에게는 죽은 사람과의 친족관계에 따라서 일정한 휴가를 주는 제도를 채택하였다. 또한 상례에서는 13개월째에 소상제(小祥祭)를, 25개월째에 대상제(大祥祭)를, 또 27개월째에 담제(禫祭)를 지내도록 규정하고, 그러한 제례와 초하루 및 보름에 올리는 삭망제례(朔望祭禮)를 위해서 역시 관리에게 휴가를 주도록 하였다.

관리에게 휴가를 주는 제도는 장례와 상례 때뿐만 아니라 조상의 기제와 사중시제(四仲時祭: 2월·5월·8월·11월에 지내는 제사)에도 적용하였다. 즉, 981년(경종 6)에는 부모의 기제례를 위해서 휴가를 주고, 982년(성종 원년)에는 조부모의 친자가 없을 경우 그 조부모의 기제례문을 위해서도 휴가를 주었으며, 1076년(문종 30)에는 다시 처부모의 기제례를 위해서 휴가를 주도록 하였다.

1048년(문종 2)에는 사중시제례(四仲時祭禮)를 위해서 관리에게 2일의 휴가를 주는 제도를 채택하였다. 그리고 1390년(공양왕 2)에는 그 사중시제와 함께 조상이 사망한 날에 지내는 기제(忌祭)를 반드시 중국 주희(朱熹)의 『가례(家禮)』에 따라서 행하도록 규정하면서, 신분에 따라 여러 가지 차이를 두도록 하였다.

첫째, 제례를 올리는 조상의 대수(代數)에 차이를 두어서, 대부(大夫) 이상은 3대, 6품 이상은 2대, 7품 이하 일반 백성은 부모 1대에 한하도록 규정하고, 둘째 사중시제례를 지내는 날짜를 신분에 따라서 달리하도록 하여, 1품 이상은 각 중월의 상순, 3품∼6품은 중순, 7품 이하 서민은 하순으로 정하였다.

셋째, 제례에 쓰는 음식, 즉 제수(祭需)의 가지와 수도 신분에 따라서 차등을 두도록 규정하였다. 고려는 이와 같이 거의 전 시대를 통하여 장례와 제례를 유교식으로 바꾸는 작업을 국가 권력이 추진하였다.

고려에서 국가가 추진한 유교적인 상례와 제례는 고려 말경까지도 일부 상층에만 한정된 것으로 일반화되지는 않았다. 예컨대, 공민왕 때까지 백일 간 복상을 하는 백일 탈상제가 일반화되어 있어서 이색(李穡)이 3년상제도 시행을 왕에게 청하고, 또 1390년에는 제례에서 조상을 모시는 대수에 관하여 대부 이상은 3대, 6품 이상은 2대, 7품 이하는 1대에 한하도록 다시 영을 내렸다.

1391년에는 명나라 법전인 『대명률(大明律)』의 복상제를 바탕으로 부모를 위한 복상을 3년으로 하도록 다시 규정한 것이나, 정몽주(鄭夢周)가 일반 백성 모두 사당을 세우고 신주를 만들어 조상의 제사를 받들도록 청하고 있는 것 등으로 보아 고려 말경까지도 유교적인 3년복상제와 3대봉사제, 신주를 모시는 사당제도가 일반화되어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부터 제도적으로 채택된 유교적인 가정의례를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초기부터 국가가 시행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그것은 국가 통치를 위한 기본제도로서 세종 때에 편찬하기 시작한 『오례의(五禮儀)』와 세조 때에 편찬하기 시작한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사(士)와 서인(庶人: 서민)의 가정의례로서 관혼상제에 관하여 상세하게 의식절차를 규정하고 있다.

가정의례를 유교적 규범으로 바꾸기 위한 국가의 노력은 조선시대가 사회 체제를 유교적으로 개편하는 작업의 하나로 추진되었다. 조선사회 가정의례의 유교적 개혁은 주희의 『가례(家禮)』를 기본 모형으로 삼아서 고려시대부터 추진한 상례 및 제례뿐만 아니라 성년식을 의미하는 관례와 혼례를 포함하여 추진되었다. 물론, 고려시대에도 일반 백성들의 관례에 해당하는 왕태자의 가원복의(加元服儀)를 유교적 절차에 따라서 행하고, 또 혼인에서는 근친혼을 금지함으로써 그러한 제도를 유교적으로 바꾸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관례와 혼례 절차의 유교적 개혁을 추진한 것은 조선조에 들어와서였다. 그것은 조선조가 유교적인 신분제도나 가족제도를 주축으로 하여 사회질서와 통합을 유지하고자 한 유교적 통치이념 때문이었다.

따라서, 조선조에서 추진한 유교적 가정의례는 무엇보다도 신분제도와 관련하여 신분에 따라서 절차에 여러 가지 차등을 두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예컨대, 혼례에서 쓰는 횃불의 수를 2품 이상은 10자루[柄], 3품 이하는 6자루로 규정하고, 장례에서는 신분에 따라서 장사의 기일에 차등을 두고 명정(銘旌: 죽은 사람의 관직, 성씨 등을 기록하여 상여 앞에 들고 가는 긴 기)의 길이와 분묘의 넓이도 품계에 따라서 차등을 두었다.

제례는 조상을 모시는 대수에 차등을 두어서 6품 이상은 3대, 7품 이하는 2대, 일반 서민은 1대, 즉 부모에 한하도록 규정하고, 또 제수의 가지와 수도 품계에 따라서 차등을 두도록 하였다. 제례에서 조상을 모시는 대수를 품계에 따라서 차등을 두는 제도는 고려에도 있었다. 그러나 고려에서는 대부 이상이 3대, 6품 이상이 2대, 7품 이하가 부모에 한하도록 규정하였던 것을, 이제 6품까지 3대, 7품까지 2대를 규정하여 그 대수를 늘리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이는 조선사회가 유교적인 부계친족제도(父系親族制度)의 확립을 강하게 지향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려와 마찬가지로, 조선사회도 그러한 유교적인 가정의례의 준수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특히 상례와 제례를 위해서는 관리에게 휴가를 주는 제도를 실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의례를 위반한 자에 대해서 형벌을 가함으로써 실천을 법으로 강제하기도 하였다. 예컨대, 혼인을 유교적인 예에 따라서 행하지 않을 경우에 벌을 가하였고, 『대명률(大明律)』의 여러 가지 규정을 적용하였다.

또한 장례와 상례도 처벌 규정을 더욱 상세하게 마련했다. 즉, 오래도록 장사를 거행하지 않거나, 부모와 남편의 상을 숨기고서 상례를 행하지 않거나, 상가에서 남녀가 한데 어울려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거나, 부모와 남편의 복상중에 혼인을 하거나 또 상기가 끝나지 않았는데 상복을 벗어버리고 평상복으로 갈아입거나 하는 경우에는 모두 벌을 가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유교적인 가정의례는 조선 초기의 그러한 국가의 제도적 조처에 의해서 널리 일반화되었던 것은 아니다. 가정의례가 하나의 제도로서 틀을 잡고 일반 민간에 널리 퍼지게 된 데에는 그것을 실행하기 위한 학자들의 노력이 크게 작용하였던 것이다.

즉, 조선시대 학자들은 유교적인 이념과 제도를 발전시키는 데 힘쓰면서 가례를 유교적인 제도로 바꾸어서 정착시키는 일에 깊은 관심을 나타내고, 유교적인 예에 관한 저술과 실천을 통하여서 그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조선시대의 가정의례에 관한 학자들의 저술은 중종 때의 이언적(李彦迪)의 『봉선잡의(奉先雜儀)』를 효시로 하며, 이어서 명종 때의 이황(李滉)의 『퇴계상례문답(退溪喪禮問答)』, 이이(李珥)의 『제의초(祭儀抄)』·『격몽요결(擊蒙要訣)』 등이 나오고, 그 뒤 조선 말기까지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예서가 계속 저술, 또 출간되었다.

이것으로 미루어보아 조선사회에서 유교적인 가정의례가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은 15세기에 『오례의(五禮儀)』(1474)가 출간되고, 또 『경국대전(經國大典)』(1469)의 편찬이 완료된 뒤를 이어서 16세기에 이들 저술들이 나오면서부터라고 생각된다.

한 가지 주목되는 것은 『오례의(五禮儀)』와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상례 및 제례와 함께 관례 및 혼례를 가정의례로 같이 다루고 있는 데 비하여, 위의 세 학자들의 저술에서는 상례와 제례만이 다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려시대에도 상례와 제례만을 중요한 가정의례로 보고 유교화가 시도된 것처럼 조선사회에서도 아직 이 시기까지는 관례와 혼례를 유교적인 것으로 바꾸는 데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며, 따라서 그것들의 유교적인 제도화는 크게 진전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관례 및 혼례를 상례 및 제례와 함께 가정의례로서 학자들이 다루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말경부터 17세기 초에 걸쳐 편찬된 김장생(金長生)의 『가례집람(家禮輯覽)』, 이항복(李恒福)의 『사례훈몽(四禮訓蒙)』, 신식(申湜)의 『가례언해(家禮諺解)』, 조호익(曺好益)의 『가례고증(家禮考證)』 등이다. 그 뒤 나온 가례에 관한 저술들은 대개 관혼상제를 함께 다루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관례 및 혼례가 상례 및 제례와 함께 유교의 제도로서 발전한 것은 17세기 무렵부터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 무렵에 『가례언해(家禮諺解)』가 편찬된 것은 우리의 주의를 끈다. 그것은 유교적인 가정의례를 우리글로 풀이함으로써 지식수준이 낮은 일반 민간에 보다 널리 퍼지게 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유교적인 가정의례에 관한 저술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진 것은 숙종대(1675∼1720)부터 정조대(1777∼1800)까지이다. 특히, 이 사이에는 가정의례의 절차를 논한 저술뿐만 아니라 예에 관한 고금의 학자들의 설과 고사를 바탕으로 한 체계적인 연구도 많이 이루어졌다.

박세채(朴世采)의 『육례의집(六禮疑輯)』, 박성원(朴聖源)의 『예의류집(禮疑類輯)』, 유계(兪棨)의 『가례원류(家禮源流)』, 이의조(李宜朝)의 『가례증해(家禮增解)』, 김종후(金鍾厚)의 『가례집고(家禮集考)』 같은 것은 그러한 업적 중에서 대표적인 것들이다.

이는 유교적인 가정의례가 조선사회에 정착하는 과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되며, 따라서 18세기를 넘어서면서 그것이 널리 일반화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회갑례와 회혼례가 중요한 가정의례로 다루어진 것은 19세기에 이르러서였다. 19세기에 출간된 우덕린(禹德麟)의 『이례연집(二禮演輯)』에서 회갑례와 회혼례를 관혼상제례와 함께 처음으로 그 의식절차를 다루기 시작하고, 그 뒤부터 그것들을 다루는 예서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

그러나 조선사회에서 그 이념과 여러가지 제도를 점차 유교화하면서 주희의 『가례(家禮)』를 모형으로 한 가정의례의 유교화가 진전되는 과정에서 의례절차에 차이가 나기도 하였다. 이른바 사색당파에 따라서 나타나는 차이가 대표적인 것이다. 사색당파 사이에는 의례절차에 관해서 이견(異見)을 나타낸 것은 물론 본질적으로는 정치적 권력을 둘러싼 당파 사이의 이해관계의 충돌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의례절차를 둘러싼 예에 관한 이론이 당쟁의 명분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의례가 친족제도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 질서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기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파간의 의례에 관한 논쟁 중에서도 특히 상례와 제례를 둘러싼 논쟁이 초점이 된 것은 조상숭배 의례를 중심으로 하는 친족집단의 통합과 질서가 유교적 사회에서는 특히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한편, 조선사회에서는 신분제적인 사회질서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가정의례 절차에서 신분에 따라 차등을 두었음을 앞에서 지적하였다. 이리하여 가정의례 절차는 곧 가족의 신분을 나타내기 때문에, 사람들은 다투어 사치와 성대를 일삼게 되어 많은 학자들이 그 폐단을 논하기도 하였다.

조상의 제사를 일반 서민은 부모에 한해서 모시도록 되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에 와서는 사대봉사(四代奉祀)를 일반적으로 행한 것도 그러한 사정을 반영한다. 그리하여 신분에 따른 가정의례 절차의 엄격한 차등은 후기의 신분제도의 붕괴와 함께 제례에 한하지 않고 다른 의례에서도 점차 흐려지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유교적 가정의례는 민족 항일기에 들어와서도 관례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그대로 계승되었다. 그것은 전통으로서 타성에 의해서만 유지된 것이 아니고, 전통의 계승 유지가 곧 일제의 통치에 대한 저항을 상징하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문화와 사회 구조가 바뀌면서 성인의 권리·의무가 연령에 의해서 법적으로 규정되었기 때문에 성년의례의 관례는 그 상징성이 없어져 점차 소멸되었다.

또한 혼·상·제례도 농촌에서는 전통 양식이 그대로 보존되었지만, 도시에서는 불교·천도교·기독교 등 다른 종교의 영향과 함께 일제의 민족문화 억압정책의 영향을 받아 점차 간소해지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광복 후, 사회·문화 구조가 다시 근대적인 방향으로 바뀌면서 가정의례에 새로운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즉, 조상숭배의 규범을 중시하던 전통적인 가족제도에 관한 이념이 쇠퇴하면서 상례나 제례 같이 죽은 조상을 위한 의례가 점차 가볍게 여겨지는 반면, 혼례와 회갑례같이 산 사람을 위한 의례는 보다 중시하게 되었다.

또, 사회구조가 산업화, 도시화함에 따라서, 한편에서는 혼례와 상례에서도 불교·천도교·기독교 등의 종교의례를 수용하는 인구가 점차 늘어났다. 다른 편에서는 전통의 의례를 대행하는 예식장·장의사(葬儀社) 같은 전문업자에 의존하는 경향이 커졌다. 그러면서 경제 발전과 함께 가정의례는 호화와 사치를 점차 더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는 1973년에 「가정의례에 관한 법률」과 「가정의례에 관한 법률시행령」·「가정의례에 관한 법률 시행세칙」·「가정의례준칙」 등을 제정, 공포하고 그것들을 개정하면서 새로운 가정의례의 발전을 추진하게 되었다.

법령으로 제정한 새로운 상례·혼례·회갑례의 주요 특징은 전통적 의례절차를 간소화하고 물질적인 호화, 사치를 금지한 데에 있다. 예컨대 양혼식과 함잡이 보내기 같은 절차를 금지하고, 혼인의식 절차, 혼인서약, 성혼선언문 등도 모두 새로 규정된 양식에 따르도록 하고 있다.

상례에서는 장기(葬期)를 3일을 원칙으로 하고, 상기(喪期)는 부모, 조부모 및 배우자 상에 한하여 100일로 하며, 기타 친족상은 장래일까지로 제한했다.

상제(喪祭)의 종류도 발인제(發靷祭)와 위령제(慰靈祭)로 제한하여 전통적인 노제(路祭)와 우제(虞祭: 장사를 지낸 뒤 드리는 세 번의 제사. 초우·재우·삼우) 등을 모두 금지하고 있다.

상복은 평상복에 규정된 상장(喪章)을 달도록 하고, 전통 상복과 굴건(屈巾: 상주가 두건 위에 덧쓰는 건)이나 제복(祭服)의 착용을 금지하고, 만장(挽章: 죽은 사람을 기리며 지은 글을 적은 깃발)과 상여(喪輿)의 사용도 금지했다.

또, 제례에서는 그 종류를 사망일의 기제(忌祭), 추석의 절사(節祀), 신년의 연시제(年始祭)로 제한하고, 묘사(墓祀)는 제수를 사용하지 않는 성묘로 대신하도록 했다. 그리고 기제, 추석제, 연시제 등 제사에서 모시는 조상은 2대까지 제한하고 참사자(參祀者)의 범위도 사망자의 직계자손에 한하도록 하고 있다.

제례의 절차는 새로 규정한 양식에 따르도록 하며, 제수는 평상시의 간소한 반상음식을 쓰도록 규정했다.

1970년대에 정부가 전통적인 혼·상·제례 등을 간소화하여 그러한 의례에 참여하는 범위를 좁히고, 혼례와 상례의 전이단계를 줄이고 또 제례에서 모시는 조상의 대수를 제한하면서 물질적 사치를 억제하는 새로운 의례를 제정한 것은 기본적으로 사회·문화 구조의 변화와 관련되어 있다.

첫째, 사회가 산업적, 도시적인 구조로 분화되면서 친족을 중심으로 하는 개인의 지위와 역할의 의미가 감퇴하여, 그러한 지위와 역할을 확인하는 통과의례로서 가정의례가 갖는 의의가 크게 쇠퇴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현대 사회구조에서는 생활 관계가 복잡해지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속도 또한 빨라지면서, 새로운 지위에서의 개인의 사회관계와 정서적 적응을 위한 전이절차를 강조하던 전통적인 가정의례를 유지하기가 어렵게 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문화적으로는 전통적인 친족제도와 조상숭배의 이념이 크게 쇠퇴하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 전통적인 친족제도와 조상숭배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서로 보완하는 기능을 수행하였다. 전통적으로 조상을 숭배하기 위한 상·제례는 친족관계를 확인, 유지하는 중요한 수단으로서, 친족을 주임으로 진행하는 의례였다. 그러나, 오늘날은 개인주의가 발전하고 조상숭배와 친족이념이 쇠퇴하여 상·제례의 의의가 바뀌면서, 친족의 협력을 바탕으로 진행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사회, 문화구조의 변화에 부응하여 유교적 전통을 바탕으로 하면서 절차를 간소화한 새로운 가정의례가 우리 사회에서 점차 확산되고 있다. 장·상례 등의 가정의례에서는 그와 함께 불교·천도교·기독교 등의 종교 의례를 수용하는 인구도 점차 늘어가고 있다.

번잡한 절차로 집단적 협력을 특히 필요로 하는 장·상례에서 전통적으로 친족이 수행하던 역할을 종교 성직자와 신도들에게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 하나의 요인이 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에는 새로 제정된 가정의례와 여러 가지 종교의 가정의례가 함께 점차 확산되고 있다.

이외에도 우리 사회에서는 돌잔치와 회혼례, 7순연, 8순연, 9순연, 백수연 등 장수를 기리는 의례가 전통 통과의례로 행해지고 있다. 그리고 일제시대부터는 일본 문화의 영향을 받아 희수연(喜壽宴: 77세를 축하하는 잔치)·미수연(米壽宴: 88세를 축하하는 잔치)을, 또 광복후부터는 서구 문화의 영향을 받아 은혼식(銀婚式: 결혼 25주년을 축하하는 의식)·금혼식(金婚式: 결혼 50주년을 축하하는 의식) 등 새로운 가정의례를 행하는 흐름도 점차 확산되고 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도경(高麗圖經)』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경국대전(經國大典)』
『대전통편(大典通編)』
『대전회통(大典會通)』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육례의집(六禮疑輯)』
『가례원류(家禮源流)』
『가례증해(家禮增解)』
『가례집고(家禮集考)』
『상례비요(喪禮備要)』
『사례편람(四禮便覽)』
『조선여속고(朝鮮女俗考)』(이능화, 동양서원, 1927)
『조선가족제도연구(朝鮮家族制度硏究)』(김두헌, 을유문화사, 1949)
「한국예속사」(김춘동, 『한국문화사대계』 Ⅳ,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70)
『조선무속고』(이능화 저, 이재곤 역, 백록출판사,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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