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고구려의 판마곶(板麻串)이었는데, 757년(경덕왕 16)가화로 고쳐 중반군(重盤郡)의 영현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송화의 동남쪽 50리 지점에 있었는데, 이곳은 용문산 남쪽의 사천계곡을 차지하고 있었다. 부근에 동창(東倉)이 있었다.
서쪽으로는 구이령(仇耳嶺)을 넘어 장연(長淵), 동쪽으로는 사천을 따라 신천에 이를 수 있었다. 지형적으로 재령평야의 일부를 차지하여 비교적 물산이 풍부하였다. 지금의 도원(桃源) 지역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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