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문주 ()

고대사
제도
신라 중고기(中古期)의 지방통치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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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의
신라 중고기(中古期)의 지방통치구역.
내용

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일원이다. 삼한시대(三韓時代)에는 감문국(甘文國)이라는 독립 소국이었으나, 231년(조분이사금 2) 대장군 석우로(昔于老)의 공격을 받고 멸망하여 신라영토로 편입, 군(郡)으로 편제되었다.

557년(진흥왕 18) 상주(上州)의 치소(治所)가 사벌주(沙伐州: 지금의 상주시 일원)로부터 옮겨오면서 감문주(甘文州)로 되어 사찬(沙飡) 기종(起宗)이 군주(軍主)로 부임하였다. 진흥왕(眞興王)대 이후 주의 치폐(置廢)를 분명하게 기재하고 있는데, 이는 군사적인 목적과 아울러 중심지로서의 주치(州治) 이동의 정치적인 의미도 갖게 되었음을 알려준다.

561년에 건립된 「창녕진흥왕순수비(昌寧眞興王巡狩碑)」에는 사방군주(四方軍主)의 하나로 감문군주(甘文軍主)가 기록되어 있으며, 614년(진평왕 36)에는 일선주(一善州: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 일원)로 주치(州治)가 옮겨지기까지 존속하였다. 진흥왕대에 성립된 사방군주제는 기존의 지방민을 노인(奴人)으로 파악하던 관점에서 벗어나 민(民)으로 인식하고 나아가 천하사방(天下四方)이라는 의식이 지방통치제도인 주제(州制)로써 구현된 것이다. 이에 상주와 하주(下州), 신주(新州)와 비열홀주(比列忽州)를 두었다. 상주와 하주는 전통적인 신라 영역으로서 정치적인 비중이 높았던 데다가 그만큼 영역이 안정된 지역이었다. 신주와 비열홀주는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치적인 중요성은 떨어지나 군사적인 중요성이 큰 지역이었다. 처음 상주의 주치는 사벌주였으나 곧 감문주와 일선주로 옮겨지는데, 이를 통해 이들 지역이 모두 입지상 중요한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의의와 평가

감문주는 대외적 팽창이 활발했던 진흥왕 때에 소백산맥을 넘어 백제 영역으로 진출하는 데 있어 군사적 전초기지와 근거지로서의 기능을 하였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상(上)
『신라 지방통치체제(新羅 地方統治體制)의 정비과정(整備過程)과 촌락(村落)』(주보돈, 신서원, 1998)
「新羅幢停考」(末松保和, 『新羅史の諸問題』, 東洋文庫,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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