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갑곶돈 ( )

목차
관련 정보
강화 갑곶돈 입구
강화 갑곶돈 입구
건축
유적
국가유산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에 있는 조선후기 갑곶나루에 설치한 돈대. 성곽시설.
국가문화유산
지정 명칭
강화 갑곶돈(江華 甲串墩)
분류
유적건조물/정치국방/성/성곽시설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사적(1984년 08월 13일 지정)
소재지
인천 강화군 강화읍 갑곳리 1020번지 외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목차
정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에 있는 조선후기 갑곶나루에 설치한 돈대. 성곽시설.
내용

강화도 해안에 설치된 53돈대(墩臺) 가운데 하나이다. 1637년(인조 15) 병자호란이 끝난 뒤 조선 정부는 강화도 방어책의 하나로 12진보(鎭堡)를 설치하였고, 그 뒤 진보와 진보 사이에도 여러 곳의 돈대를 쌓았다. 돈대는 1679년(숙종 5)에 어영군(御營軍) 3,000인과 함경·황해·강원 등 3도 승군(僧軍) 8,000인을 동원하여 40일 만에 축조하였다.

갑곶돈은 통진(通津)에서 강화로 들어가는 갑곶나루에 설치하였는데, 돈대 주위가 113보(步)였고 성벽 위에 낮게 쌓은 성가퀴인 치첩(雉堞)은 40개였다고 한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함대에 속한 600명의 군사가 이곳으로 상륙하여 강화성을 점령하였지만, 정족산성(鼎足山城) 전투에서 양헌수(梁憲洙)가 이끈 부대에 패하여 물러났다.

1875년(고종 12)에는 갑곶돈에 갑곶포대가 설치되었다. 이 때 갑곶돈은 망해(望海)·제승(制勝)·염주(念珠) 등 세 포대와 함께 제물진(濟物鎭)의 관할에 속하였다. 1876년에 일본의 전권대신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가 6척의 함선을 이끌고 와 이곳으로 상륙한 뒤 운요호 사건의 책임을 물어 강압적으로 강화도 연무당(鍊武堂)에서 조선의 접견대관 신헌(申櫶)과 강화도 조약(한일수호조규, 병자수호조약)을 맺었다. 그 뒤 갑곶돈은 허물어져 일부만 남았던 것을 1976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참고문헌

『고종실록(高宗實錄)』
『강화사』(강화사편찬위원회, 1977)
『경기도지』(경기도지편찬위원회, 1955)
관련 미디어 (3)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