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ㆍ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인 이승훈(李昇薰)이 1907년 7월 평양에서 안창호(安昌浩)의 강연에 감동하고 이를 계기로 청년교육이 이 나라를 구하는 길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 길로 고향에 돌아와 서당을 수리하여 입학생 7명으로 강명의숙을 설립하였다.
이승훈은 강명의숙을 세운 지 두 달 후에 소학교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중학교를 세울 결심을 하고 오산학교를 세웠다. 강명의숙은 소학교에 해당되는 것이었는데 소학교를 세우는 일이 한 소대의 힘이 된다고 하면 중학교를 세우는 일은 한 연대의 힘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마침 평안북도관찰사로 부임한 박승봉이 이승훈의 교육사업을 잘 이해하여 중학교 설립을 후원하였다.
‘강명의숙’에서 가르친 교과목은 국어산술ㆍ역사ㆍ지리ㆍ체조ㆍ훈련 등이었고 특히, 이승훈은 학생들에게 ‘삽보’라는 모자를 쓰게 하였으며, 학교에 종각을 달아 학생들과 마을사람들에게 시보(時報)의 구실을 하였다.
한말 평안도지방의 대표적 사립학교로서 개교 이래 일제강점기 수많은 독립투사를 배출한 점에서 교육사적 의의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