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무장 출신. 필묵상을 경영하던 중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1906년심남일(沈南一, 또는 沈守澤)로부터 의병을 일으키자는 서신을 받고 기삼연(奇參衍)·김준(金準)·김율(金聿) 등과 협의하여 김율의 의진에 입대, 심남일과 더불어 부장으로 활약하였다. 김율이 전사하자, 심남일을 통수로 추대하고 전군장(前軍將)이 되어 의병을 거느리고 전라남도 일대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1907년 8월 한국군 강제해산 후 심남일과 협의하여 11월 1일함평군 신광면에서 의거하여 심남일의 선봉장이 되었다. 심남일 의진은 1908년 2월 13일 신광면을 떠나 남평으로 행군, 3월 7일강진군 오치동에서 접전하여 적 수십명을 살상하고 다수의 무기를 노획하였다. 4월 15일에는 장흥 곽암(藿巖)에서 적 3명을 사살하고, 6월 11일에는 남평 장담원(長淡院)의 접전에서 적 5명을 사살하였으며, 25일 반촌(坂村)에서 머무르던 중 접전하여 적 5명을 살상하고 많은 전리품을 노획하였다.
7월 그믐에는 적장 고토[琴平山]의 부대와 접전하여 적장 이하 10여 명을 사살하고 당산촌(堂山村)으로 후퇴하였다. 그뒤 장흥의 대치·해남 등지에서 접전하여 많은 전공을 올렸다. 1909년 3월 능주 일대에서 적과 크게 접전하였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두문(杜門)으로 후퇴하였다. 5월 12일 석호산(石虎山) 일대에서 의병전의 효과적 전개를 위하여 의병장 안규홍(安圭洪)과 연합전선구축을 기획하였으나, 의병을 해산하라는 조칙을 받고 7월 21일 영암에서 부득이 해산하였다. 그뒤 의병장 심남일과 능주로 잠행하여 풍치(風峙)의 바위굴에서 은신하던 중 10월 9일에 붙잡혀 총살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