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강음현은 동쪽과 북쪽은 평산, 서쪽은 배천, 남쪽은 개성과 접하고 있었다. 본래 고구려의 굴압현(屈押縣, 일명 江西)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때 강음으로 바뀌어 송악군(松嶽郡)의 영현이 되었다.
1018년(현종 9) 개성현의 속현이 되어 상서부성(尙書部省)의 직할지가 되었다. 1413년(태종 13) 현감을 두고 경기도에서 황해도로 이속하였다. 1651년(효종 2)우봉(牛峰)과 합하여 금천군(金川郡)을 이루었으며, 1895년(고종 32)경기도 개성부에 속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다시 황해도로 복귀하면서 미원면(美原面)을 제외한 모든 지역이 금천군에 편입되었다.
조선시대에 강음의 치소(治所)가 예성강 하류의 서쪽에 자리 잡고 있어 강서(江西)라는 지명이 나왔으며, 굴압(屈押)은 곡악(曲岳)의 뜻을 가지므로 예성강이 이곳에서 곡류하는 것과 진산이었던 천신산(天神山)의 의미를 함께 나타낸 것이다.
당시에는 이곳에 강음창(江陰倉)이 있어 금천지방의 세곡(稅穀)을 모아 황해로 운반하였다. 조을포(助乙浦)는 나루터이기도 해서 개성과 연결되었다. 이곳은 교통의 요지로 서쪽으로는 해주, 동쪽으로는 금천, 북쪽으로는 평산과 연결되는 도로가 발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