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 고려청자 요지 ( )

강진 고려청자 요지
강진 고려청자 요지
공예
유적
국가유산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에 있는 고려시대 청자를 굽던 가마터.
국가문화유산
지정 명칭
강진 고려청자 요지(康津 高麗靑瓷 窯址)
분류
유적건조물/산업생산/제조업/유기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사적(1963년 01월 21일 지정)
소재지
전남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산4번지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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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에 있는 고려시대 청자를 굽던 가마터.
개설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대구면 요지는 특히 용운천 좌우에 집중적으로 남아 있는데, 용운천 상류의 용운리 동북쪽 계곡에 위치한 정수사 밑 운곡마을로부터 용운천이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해변에까지 산재한다.

내용

현재 용운리에는 65개소의 요지가 남아 있는데, 용운 저수지의 설치로 수몰된 3∼5기의 가마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이 중 몇 개소를 제외한 대부분의 요지는 10세기에서 11세기에 걸쳐 성립된 초기 요지로서, 중국의 월주요(越州窯) · 요주요(耀州窯) · 여요(汝窯)와의 관계를 살필 수 있는 조각들이 각 요지에서 발견된다. 특히, 해무리굽〔日暈文〕으로 보이는 당나라 말 오대의 월주요산의 청자완과 닮은 조각들이 발견될 뿐만 아니라, 이들 초기 청자요지 사이에서 통일신라시대 말기의 토기를 제작하던 요지가 몇 군데 발견되어, 청자의 기원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도 주목된다. 아직 완전한 비색(翡色)에 도달하지 못한 유색(釉色), 그리고 월주요 · 요주요 · 여요 등의 청자와 비슷한 기형(器形)과 문양을 찾아볼 수 있다. 이곳은 산세가 험하고 가마가 있는 산기슭의 경사도 급하고 협소하여 가마의 규모는 작으나 수효는 많았던 것 같다.

계율리는 계치 · 청룡 · 난산 · 율촌마을을 총칭하는데, 현재 40여 개소의 요지가 남아 있다. 이곳의 요지도 일부는 계치의 동쪽 골짜기의 저수지에 수몰되고 논으로 변한 곳도 있으나, 대체로 잘 보존되어 있다. 계율리의 가마는 용운리와 같이 고식(古式)의 것도 있으나 대체로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의 가마로서 양식화된 상감청자 조각이 많이 발견되고 있어, 대구면 내의 가마가 땔나무를 찾아 아래, 위로 이동하였던 것을 나타낸다.

계치 골짜기를 지나 용운천 하류의 비교적 넓은 들에 위치한 사당리는 여계산 밑의 산기슭 마을인 당전마을 · 미산마을 · 백사마을 일대로 45개소의 요지가 있으나, 당전마을과 백사마을의 용운천 가에 있던 일부의 요지가 하천의 침식으로 없어지거나 대부분 논밭으로 변하여 보존상태는 불량하다. 특히, 당전마을의 요지는 청자 최성기의 것으로서 도굴의 피해가 많았다. 10, 11세기에 성립된 요지도 일부 있으나, 12세기 전반에서 13세기에 이르는 것이 제일 많고 14세기에 제작된 것도 있다. 특히, 당전마을의 117·126번지 일대는 12세기 전 · 중 · 후반에 걸치는 가마가 집중적으로 있던 곳으로, 우수한 비색과 상감기법을 보여 주는 고려자기 가마의 대표적인 예이다.

수동리는 사당리 남쪽의 들판에 있는 마을로 6개소에 요지가 있다. 대체로 13, 14세기경의 것으로, 일부는 하천에 침식당하고 일부는 논밭으로 변하였다.

가마의 특징

이상과 같이 대구면 일대는 고려 전시대에 걸치는 요지를 총망라한 것이 그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구조에서도 각 시기의 특색을 잘 보여 주고 있다. 10, 11세기에 성립된 용운리 가마는 자연 구릉을 이용한 등요(登窯)로서, 바닥은 층단이 아닌 경사면을 이루고 있고 모래와 도지미, 도지미를 받치는 보조적인 것을 이용하여 경사를 극복하였다.

12세기 청자 전성기의 가마로서는 1964년 이래 조사되어 온 대구면 사당리 요지를 들 수 있다. 이곳 가마는 5∼6m의 산기슭 경사면에 구축하였는데, 바닥은 경사진 모래바닥이며 칸막이 가마였다. 칸막이 밑의 창살구멍은 2, 3개였던 것 같으나, 각 칸의 길이는 알 수 없다. 이 가마는 한번 가마를 만들고 같은 장소에서 같은 가마를 여러 차례에 걸쳐 개수, 보수하였는데 최초 가마는 지면을 약간 파고 묻었으며, 개수와 보수를 할 때 점차 요지의 바닥이 높아져서 최후의 바닥은 오히려 지면보다 높아지고 있다. 또한, 바닥뿐만 아니라 가마벽도 개수와 보수 때 최초의 가마벽 안에 다시 쌓고 바닥도 높아진 것이다. 따라서, 가마의 너비는 점점 줄어들고 바닥은 지면 위로 올라갔다. 이 가마의 앞부분은 파괴되어 있었으며, 현재 남아 있는 길이는 약 7m, 너비는 최초의 것이 143∼151㎝, 최후의 것은 112∼130㎝였다.

13, 14세기의 가마로 추정되는 계율리 제25호 요지에 대한 조사 보고에 의하면, 산기슭 비탈에 너비 1.25m 가량의 낮은 골을 파고 골의 양쪽 벽에는 점토를 채운 갑발(匣鉢)을 쌓아올리고, 갑발과 갑발 사이는 다시 점토를 발라 메워 벽면을 고르게 하였으며, 지상으로 올라오는 일부 측벽과 천장 부분을 점토로 둥글게 쌓아올린 것 같다. 가마의 길이는 18m, 높이는 90㎝쯤일 것이며, 바닥에는 모래를 깔고 가마의 입구와 윗부분 바닥에 개비를 횡으로 놓아 낮은 층급을 이루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의의와 평가

대구면 요지에서 출토되는 기형은 주로 대접 · 발(鉢) · 접시 · 병 · 매병(梅甁) · 잔 · 합(盒) · 호(壺) · 기와 · 향로 · 상형편(象形片) 등으로 다양하며, 순청자(純靑磁) · 상감청자가 대부분이지만 철회(鐵繪) · 진사(辰砂) · 철채(鐵彩) · 철유(鐵釉) · 흑유(黑釉) · 백자(白磁) · 퇴화청자(堆花靑磁) 등 거의 모든 기법의 도자기 조각이 출토된다.

유색은 녹청색에서 담청색 · 담녹색 · 갈색 · 황색 · 회청색 · 엷은 청색 등 시대에 따라 다르며, 한 요지에서도 다양한 유색이 함께 출토되고 있다. 문양은 오목새김 · 돋을새김의 경우 모란 · 국화 · 봉황 · 연화 · 앵무새 등이 많으며, 상감의 경우 운학(雲鶴) · 야국(野菊) · 포류수금(蒲柳水禽) · 모란 · 보상화(寶相華) · 연화 등으로 다채롭다.

대구면 일대의 요지는 전북특별자치도 부안군 보안면의 청자요지와 함께 쌍벽을 이루는 곳으로, 고려청자 연구에 가장 중심이 되는 도요지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강진군의 문화유적』-목포대학박물관학술총서 13-(목포대학교박물관, 1989)
『한국청자도요지』(최순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2)
『청자와 백자』(진홍섭,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4)
『世界陶磁全集』-高麗-(東京 : 小學館,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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