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 영랑생가는 현재 본채와 사랑채, 그리고 문간채 등 3동만 남아 있고, 주변에는 영랑의 시어(詩語)가 되는 모란밭이 있다.
생가의 본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인 초가집이지만 뼈대가 굵은 네모기둥을 사용한 규모가 큰 집이다. 상량문에 “광무 10년 병오 4월(光武十年丙午四月)…”이라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 집의 건립연대는 1906년임을 알 수 있다. 사랑채는 흔히 안채 앞에 있는 것이 일반적인데 영랑생가는 옆으로 길게 위치한다.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오히려 본채보다도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다. 특이한 것은 전면과 양측 2칸에 ㄷ자형으로 마루를 깔았으며 우측 1칸에는 마루 앞에 나지막한 난간을 설치하였는데 안상형(眼象形) 궁창(문의 하부에 낮게 끼워 댄 널)을 뚫었다. 창문은 이중창문으로 내창은 아자(亞字)살 모양의 미서기창이며 외창은 띠살 모양의 여닫이창이다. 이 사랑채는 1930년대 건물로 전해지고 있다.
영랑의 본명은 김윤식(金允植)으로 1903년 바로 이곳에서 태어났다. 서울의 휘문고보를 거쳐 일본 동경 청산학원에서 수학한 후 귀국하여 박용철(朴龍喆) 등과 교류하면서 최초로 『시문학』 동인지를 만들면서부터 작품을 발표하였다. 영랑은 일제치하에서 설움 받은 내용을 시로 표현하고 자신의 젊은 정열과 민족의 기상을 은연중에 문학을 통해서 불살랐던 우리나라 현대문학의 거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가옥은 건축적 의미를 지녔다기보다는 영랑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가치가 높다 하겠다.